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23 주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23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귀먹고 말 더듬는 이를 고쳐주시는 기적 이야기입니다. 참으로 놀라운 기적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당신의 손가락을 앓는 이의 두 귀에 넣으셨다가 빼내시고, 다시 손가락에 침을 발라 혀에 대시니, 곧바로 그의 귀가 열리고 묶인 혀가 풀려서 말을 제대로 하게 되었다고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저는 오늘의 복음말씀을 2가지 의미에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첫째는 ‘메시아 시대의 도래’입니다. 이것의 의미를 이해하려면 오늘의 제 1 독서의 말씀을 이해해야 합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기원전 587년에 이스라엘은 잠시 역사 속에서 사라진 나라가 되었습니다. 강대국 바빌론 제국의 침략으로 수도 예루살렘과 성전은 파괴되었으며, 백성은 고향을 떠나 바빌론에서 귀양살이를 해야 했습니다. 그들에게 희망이란 없었습니다. 나라가 망했기에 언제 고향으로 돌아갈 수 있을지 기약도 할 수 없었으며, 그들의 삶의 중심이었던 성전은 파괴되었습니다. 그저 그들이 할 수 있는 일이란, 바빌론 강가에서 눈물을 흘리며 고향을 그리워하는 것뿐이었습니다.

 

바로 이때 이사야 예언자가 나타나서 “굳세어져라, 두려워하지 마라. 보라, 너희의 하느님을! 복수가 들이닥친다, 하느님의 보복이! 그분께서 오시어 너희를 구원하신다. 그때에 눈먼 이들은 눈이 열리고, 귀먹은 이들은 귀가 열리리라. 그때에 다리 저는 이는 사슴처럼 뛰고, 말 못하는 이의 혀는 환성을 터뜨리리라. 광야에서는 물이 터져 나오고, 사막에서는 냇물이 흐르리라. 뜨겁게 타오르던 땅은 늪이 되고, 바싹 마른 땅은 샘터가 되리라.” 라고 예언을 했습니다. 절망의 늪에 빠져있던 이스라엘 백성은 이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을 듣고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죽음만을 생각하던 이들이 이제는 살아야겠다는 희망을 갖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은 예수 그리스도에 의해 이루어졌습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나자렛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서의 한 대목을 읽으셨습니다. “주님께서 나에게 기름을 부어 주시니 주님의 영이 내 위에 내리셨다. 주님께서 나를 보내시어 가난한 이들에게 기쁜 소식을 전하고 잡혀간 이들에게 해방을 선포하며 눈먼 이들을 다시 보게 하고 억압받는 이들을 해방시켜 내보내며 주님의 은혜로운 해를 선포하게 하셨다.” 그리고 말씀하셨습니다. “오늘 이 성경 말씀이 너희가 듣는 가운데에서 이루어졌다.”

 

이것은 당신의 정체성과 소명을 밝히신 사건이었으며, 이사야 예언자의 예언이 이 자리에서 이루어졌음을 공식적으로 드러낸 것이었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공생활 내내 당신이 받은 소명대로 사셨습니다.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을 찾아 다니셨으며, 병든 이들을 고쳐주셨고, 하느님께서 어떠한 분이신지, 또 하느님 나라가 어떠한 나라인지, 그리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가르치셨습니다.

 

세례자 요한도 옥에 갇혔을 때 자신의 제자들을 예수님께 보내어 질문을 하게 했습니다. “오실 분이 선생님이십니까? 아니면 저희가 다른 분을 기다려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이렇게 대답을 하셨습니다. “요한에게 가서 너희가 보고 들은 것을 전하여라. 눈먼 이들이 보고 다리 저는 이들이 제대로 걸으며, 나병 환자들이 깨끗해지고 귀먹은 이들이 들으며, 죽은 이들이 되살아나고 가난한 이들이 복음을 듣는다.”

 

제가 지금 말씀드렸던 세 개의 성경구결이 모두 같은 내용을 담고 있습니다. 오늘의 제 1 독서의 말씀과 예수님께서 회당에서 이사야 예언자의 두루마리를 받아 읽으셨던 대목, 그리고 세례자 요한의 제자들에게 하신 말씀. 이것은 메시아가 도래했을 때 일어날 일들이었으며, 이것이 예수님에 의해서 이루어졌다는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모습 안에서 메시아를 보았던 이들이 있는가 하면, 대부분은 예수님을 메시아로 인정하지 않았습니다. 그들은 눈은 있었지만 보지를 못하였고, 귀가 있었지만 듣지를 못하였습니다. 다시 말해서 그들은 아직 영적인 눈과 귀가 열리지 않았던 것입니다. 이런 상황들은 지금도 계속 이어져 내려오고 있습니다. 이것이 우리가 오늘 복음말씀을 들으면서 새겨야 하는 두 번째 의미입니다.

 

저는 병원에서 5년 동안 근무를 하면서 이런 모습들을 자주 볼 수 있었습니다. 어떤 분들은 육체적인 질병 때문에 건강을 해치게 되기는 했지만, 영적인 눈을 뜸으로써 새롭게 하느님을 만나고, 자신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에 대해 깊은 묵상과 자성을 하시는 분들을 볼 수 있었습니다. 하지만 또 어떤 분들은 지금의 육체적인 고통이 너무나 힘들고 받아들이기가 어려워 하느님의 뜻을 찾지 못하고 원망어린 눈길로 하느님을 바라보는 분들도 계심을 보았습니다.

 

모든 것에는 의미가 있습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가 육체적인 고통이나 다른 어려움 때문에 힘들어 하고 희망도 없는 절망의 늪에 빠져 있는 것을 원하시지 않으십니다.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것은 그런 절망의 늪에서 희망이라는 작은 빛을 통해 새롭게 태어나기를 원하시고 계십니다. 다시 말해서 육체적인 고통이나 다른 어려움들을 통해 영적인 눈을 뜨고 영적인 귀가 열리기를 기다리고 계십니다.

 

이제 우리는 우리를 향해 ‘에파타’ 하고 외치시는 예수님의 음성을 들어야 합니다. 그리고 그분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해야 합니다. 이것이 예수님께서 원하시는 우리의 삶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하셨던 것처럼, 예수님의 마음과 눈과 귀로 다른 사람들, 특히 어려움과 고통 중에 있는 사람들을 바라보며 그들에게 다가가야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영광스러우신 우리 주 예수 그리스도를 믿으면서, 사람을 차별해서는 안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세상의 가난한 사람들을 골라 믿음의 부자가 되게 하시고, 당신을 사랑하는 이들에게 약속하신 나라의 상속자가 되게 하지 않으셨습니까?”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이 말씀은 우리 자신을 통하여 세상의 모든 사람들이 예수님을 주님으로 받아들이는 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그리고 한 가지 우리가 더 생각해 보아야 할 것은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귀먹고 말 더듬는 이가 체험한 것처럼, 우리가 예수님을 ‘보아도 보지 못하고, 들어도 듣지 못하는’ 처지에 있음에도 불구하고, 사랑으로 우리에게 다가오시어 우리의 눈과 귀, 그리고 입을 열어주시려는 예수님의 사랑을 깨닫고 믿는 것입니다. 우리의 노력이 있기 전에 이미 예수님의 사랑이 앞서 있다는 믿음이야말로 우리 신앙인의 희망의 근거이기도 합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 인간은 대화를 나누면서 커나갑니다. 핏덩어리 갓난아기가 하루하루 자라나 어느덧 ‘엄마, 아빠’ 하고 말을 걸어오면 그 부모는 굉장히 기뻐합니다. 그런데 사실 그 맑은 소리의 아기의 부름은 그 아기 엄마 아빠의 부름에 대한 응답이었습니다. 그 아기가 그렇게 엄마 아빠를 부르기 전에 먼저 그 아기의 부모가 사랑을 가지고 그에게 다가가, 수도 없이 그 아기의 이름을 불렀기 때문에 그 아기도 ‘엄마, 아빠’ 하며 응답할 수 있었던 것입니다.

 

그런데 우리의 신앙생활에도 비슷한 측면이 있습니다. 우리가 하느님을 부르기 전에, 하느님께서 먼저 우리를 수도 없이 부르셨다고 볼 수 있기 때문이다. 따라서 하느님께 대한 우리의 기도는 하느님께서 우리에게 베푸신 사랑에 대한 응답의 성격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래서 지금도 우리를 당신 사랑으로 부르시는 하느님께 굳건한 믿음을 가지며, 우리의 눈과 귀와 입을 열어주시기를 청해야 하는 이유가 바로 여기에 있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를 사랑하시어 먼저 우리의 이름을 불러주시는 하느님께 감사를 드리며,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나날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 코로나 19로 인하여 지난 7월 12일부터 65명 이내로만 미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모두 방역수칙 철저히 지켜주시고,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