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31 주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31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예수님의 여러 가르침 중, 핵심이 되는 내용입니다. “모든 계명 가운데에서 첫째가는 계명은 무엇입니까?” 라는 율법 학자의 질문에 예수님께서는 “첫째는 이것이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라고 대답하시고는, 질문자가 묻지도 않은 둘째 계명, ‘네 이웃을 너 자신처럼 사랑해야 한다.’ 라고 대답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께서 이 두 계명을 통해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과 ‘이웃에 대한 사랑의 계명’이 갈릴 수 없는 관계에 있음을 알려준 것입니다. 이 점은 예수님의 대답에 대하여 전적으로 동감한다는 율법 학자의 다음 말에서도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과 ‘이웃을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 제물보다 낫습니다.” 이 말은 ‘내가 바라는 것은 제사가 아니라, 사랑이다.’라는 호세아 6장 6절의 말씀을 연상시켜 주고 있습니다.

예수님의 말씀에 대한 율법 학자의 반응과 율법 학자의 말에 대한 예수님의 칭찬에서 보이듯이, 오늘 복음말씀의 예수님의 가르침은 구약성서의 핵심 가르침을 재천명 한 것입니다. 사실, 예수님께서 첫째 계명으로 인용하신 “이스라엘아, 들어라.” 라는 말로 시작되는 신명기 6장 4절과 5절의 말씀은, 경건한 유다인들이 아득한 옛날부터 아침기도와 저녁기도 때 바쳤던 신앙 고백적 계명입니다. 지금 우리 신앙인들에게 주님의 기도가 매우 중요한 것처럼, 유다인들에게 있어서 신명기 6장의 계명은 태어나서 죽을 때까지, 그들의 삶의 여정에 동반된 기도였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늘 마음에 새기고자, 이 말씀을 적은 작은 종이를 작은 상자에 넣어 몸에 지니고 다닐 정도였습니다.

“이스라엘아, 들어라. 주 우리 하느님은 한 분이신 주님이시다. 그러므로 너는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정신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주 너의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 경건한 유다인들에게 이 신명기의 말씀은 하느님의 사랑과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유다인들은 이 말씀을 늘 되새기면서 자신들에게 베풀어 주셨던 하느님의 사랑을 기억했으며, 어렵고 힘들 때에는 이 말씀을 통해 힘을 얻었습니다.

 

그래서 신명기의 내용을 보면, 모세는 ‘하느님께 대한 사랑의 계명’을 말하기 전에, 과거에 하느님께서 이스라엘 민족에게 베풀어주신 극진한 사랑에 대해 길게 상기시켜 주고 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도 한결같은 하느님의 사랑에, 한결같은 사랑으로 응답해야만 했습니다. 이 요청은 진정한 사랑이 요구하는 ‘의무’였습니다. 그런데 하느님에 대한 이 사랑의 요청과 의무는 이미 ‘이웃에 대한 사랑’의 요청과 의무를 내포하고 있습니다.

 

사실 어떤 사람이 진정으로 ‘마음을 다하고 목숨을 다하고, 힘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면, 그는 하느님께서 특별히 관심을 베푸시는 약하고 불쌍한 이웃을 사랑하지 않을 수 없습니다. 그리고 목숨을 다하여 하느님을 사랑한다는 사람이 성전에서 거행되는 예식 시간에만 하느님을 사랑하고, 성전 밖의 일상생활에서는 하느님을 사랑하지 않고 산다면, 그는 목숨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 아니라, 삶의 지극히 짧은 시간 동안만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입니다. 이렇게 볼 때 ‘이웃 사랑’의 계명은 ‘온 삶을 다해 하느님을 사랑해야 한다.’는 계명의 당연한 귀결이라고 볼 수 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 사랑의 계명은 이웃 사랑의 계명으로 완성되는 것입니다.

 

우리 그리스도교 신앙은 초기부터 예수님을 따라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면서 하느님을 중심으로 모두가 형제자매라는 사실을 깨달았습니다. 사도 요한의 편지를 보면 우리가 서로 사랑해야 하는 이유에 대해 “실상 사랑은 하느님에게서 오고 사랑하는 모든 이는 하느님에게서 났으며 하느님을 압니다.” 라고 가르쳤습니다. 사랑의 원천은 하느님이라는 뜻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사랑할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고, 하느님을 아버지로 체험한다는 것입니다. 같은 사랑이 하느님에게서 우리에게로 흘렀고, 또 우리에게서 우리 이웃에게로 흘러야 합니다. 따라서 하느님의 자녀는 이 사랑의 흐름을 차단하지 않고, 그 사랑 안에 머물면서 이웃에게 사랑을 실천하는 것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두 개의 계명을 말씀하셨지만 실제로는 ‘사랑하라’는 하나의 계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율법 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새롭게 알아듣고, 유대교 율법 학자로서는 할 수 없는 파격적인 발언을 했습니다. ‘이웃을 자기 자신처럼 사랑하는 것이 모든 번제물과 희생제물을 바치는 것보다 낫습니다.’ 그는 율법을 지키고 제물을 바쳐서 두려움의 대상인 하느님으로부터 은혜를 얻어내려는 자기중심적 신앙에서, 신앙은 하느님의 사랑 안에 머무는 것임을 깨달았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에게 ‘너는 하느님의 나라에서 멀리 있지 않다.’ 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 1 독서에서 모세도 하느님 사랑의 계명을 선포하면서 백성에게 “내가 너희에게 이르는 그분의 모든 규정과 계명을 지켜라. 그러면 오래 살 것이다. 그러므로 이스라엘아, 이것을 듣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그러면 주 너희 조상들의 하느님께서 너희에게 약속하신 대로, 젖과 꿀이 흐르는 땅에서 너희가 잘되고 크게 번성할 것이다.” 라고 약속해 주었습니다. 예수님께서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율법 학자에게 하셨던 따뜻한 격려의 말씀처럼 말입니다. 그리고 이 말씀은 바로 오늘 복음말씀을 들은 우리에게도 하시는 은총의 말씀인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자신의 모든 것을 포기하시고, 하느님 사랑과 이웃 사랑의 계명을 철저히 실천하신 분이 예수님이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 2 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그분께서는 당신을 통하여 하느님께 나아가는 사람들을 언제나 구원하실 수 있습니다. 그분께서는 늘 살아 계시어 그들을 위하여 빌어 주십니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예수님을 그리스도로 믿고 그분의 삶과 말씀을 받아들여 실천하는 이들이 구원에 이른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가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본받아 구원에 이르기 위해서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율법학자의 자세를 배워야 합니다.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율법학자는 예수님의 말씀을 듣고 깨달았습니다. 그는 자신이 가지고 있던 고정관념을 버렸습니다. 우리도 여러 가지 고정관념을 가지고 있습니다. 그런데 그 고정관념이 우리가 사랑해야 하는 하느님을, 그리고 이웃을 보지 못하게 만들 때도 있습니다. 그래서 고정관념을 깨버릴 때, 하느님을 보게 되고, 이웃이 내 눈에 들어오게 되며, 사랑을 실천하게 됩니다. 하느님께서는 사랑이십니다. 그리고 불쌍히 여기시는 분이십니다. 불쌍히 여김에서 사랑은 시작됩니다. 이제 그 사랑이 우리에게 흘러 왔습니다. 우리는 하느님의 사랑을 막을 권리가 없습니다. 그저 그 사랑을 이웃들에게 전해줄 의무만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도 마음을 열고, 주님의 사랑을 받아들이며 그 사랑을 이웃에게 전하는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