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28 주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28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 한 청년이 예수님께 다가와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하고 물었습니다.

 

성인이 되어서 천주교에 입교하신 분들은 세례성사를 받으시면서 이런 질문을 받으신 적이 있습니다. 세례예식 중 사제는 예비 신자에게 “당신은 하느님의 교회에서 무엇을 청합니까?” 하고 물으면, 예비 신자는 “신앙을 청합니다.” 하고 대답합니다. 그러고 나서 사제는 “신앙이 당신에게 무엇을 줍니까?” 하고 물으면, 예비 신자는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하고 대답합니다. 그리고 사제는 영원한 생명에 대해 설명을 합니다.

 

“영원한 생명이란? 참 하느님을 알고 그분이 보내신 예수 그리스도를 아는 것입니다. 당신은 이미 그분의 말씀을 들었고, 그분의 계명을 지키기로 결심하였습니다. 당신은 형제들과 함께 사귀며 기도에 참여하고 착실한 그리스도교 신자가 되기 위하여 이 모든 것을 행한 것이 아닙니까?”라고 설명을 합니다. 이 설명에 의하면 우리는 하느님을 알고, 예수님의 말씀을 따르고 삶을 본받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습니다.

 

그렇다면 예수님께서는 어떤 말씀을 하셨으며, 어떤 삶을 보여주셨습니까? 오늘 복음말씀에 그 정답이 나와 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부자 청년에게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랑하라는 말씀입니다. 예수님의 삶은 사랑의 극치였습니다. 이것을 아는 것이 오늘 제 1 독서에서 말하는 지혜입니다.

 

‘지혜’를 국어사전에서 찾아보면 ‘사물의 이치나 상황을 제대로 깨닫고 그것에 현명하게 대처할 방도를 생각해 내는 정신의 능력’ 이라고 나와 있습니다. 즉 지혜는 세상의 이치, 삶의 의미 등, 깨달음의 경지라고 할 수 있습니다. 지식과는 다른 차원입니다. 지식이 이성을 통해 정보를 얻는 것이라면, 지혜는 지식을 뛰어넘는 깨달음의 차원입니다. 예를 들어서,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가? 인간은, 자연은 왜 존재하는가? 사랑이란 무엇인가? 왜 신앙생활을 하는가? 등등, 정신적인 세계의 영역으로 볼 수 있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지혜서의 저자는 “나는 지혜를 왕홀과 왕좌보다 더 좋아하고 지혜에 비기면 많은 재산은 아무것도 아니라고 생각하였으며 값을 헤아릴 수 없는 보석도 지혜와 견주지 않았다. 나는 지혜를 건강이나 미모보다 더 사랑하고 빛보다 지혜를 갖기를 선호하였다. 지혜에서 끊임없이 광채가 나오기 때문이다. 지혜와 함께 좋은 것이 다 나에게 왔다.” 라고 알려주었습니다.

 

지혜서의 저자는 지혜를 찾는 것이 왕권을 얻는 것보다 좋고, 재산이나 보석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했습니다. 왜냐하면 지혜를 통해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렇다면 지혜서의 저자가 왕권보다도 좋고, 재산과 보석과도 비교가 되지 않는다고 한 지혜는 무엇일까요? 그것은 하느님이시며, 영원한 생명입니다. 이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서는 하느님을 알아야 하고, 예수님의 뜻을 알아차리고 삶을 통해 드러내야 합니다. 바로 그것은 사랑의 삶입니다.

 

이 사랑의 삶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니라 가슴으로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하느님을 알게 된 지혜로운 이들은 어떤 금은보화를 얻으려고 노력하기보다 하느님을 더 알고자 하며, 더 사랑하려고 하고, 그분의 뜻을 실천하고자 노력하는 것입니다. 그분에게서 모든 것이 나오기 때문입니다. 그리고 그분을 통해서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기 때문입니다. 그렇다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주시는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인가? 하는 질문을 할 수 있습니다. 그 대답이 제 2 독서에 나와 있습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히브리서의 저자는 “하느님의 말씀은 살아 있고 힘이 있으며 어떤 쌍날칼보다도 날카롭습니다. 하느님 앞에서는 어떠한 피조물도 감추어져 있을 수 없습니다. 그분 눈에는 모든 것이 벌거숭이로 드러나 있습니다.” 라고 가르쳐주고 있습니다. 하느님 앞에 우리는 벌거숭이일 뿐입니다.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어머니 뱃속에서부터 점지하시어 우리를 당신의 자녀로 불러주셨습니다. 이런 분 앞에 우리가 감출 수 있는 것은 아무 것도 없습니다. 그저 우리는 우리의 모습 그대로를 그분에게 보여드릴 뿐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 하신 말씀을 따르고 삶을 본받을 뿐입니다. 이것이 우리가 아는 지혜입니다. 그리고 이러한 사랑의 삶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을 줍니다.

 

그러나 복음말씀을 보면 부자 청년은 영원한 생명을 머리로는 이해하고 있었지만 지혜롭지는 못했습니다. 그가 예수님께 물었습니다. “선하신 스승님, 제가 영원한 생명을 받으려면 무엇을 해야 합니까?”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여러 가지 율법을 지킬 것을 제시하셨습니다. 그러자 부자 청년은 “스승님, 그런 것들은 제가 어려서부터 다 지켜 왔습니다.”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너에게 부족한 것이 하나 있다. 가서 가진 것을 팔아 가난한 이들에게 주어라. 그러면 네가 하늘에서 보물을 차지하게 될 것이다. 그리고 와서 나를 따라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나 그는 이 말씀 때문에 울상이 되어 슬퍼하며 떠나갔다. 그가 많은 재물을 가지고 있었기 때문이다.” 라고 복음은 전해주고 있습니다.

 

부자 청년이 떠나자 예수님께서는 “부자가 하느님 나라에 들어가는 것보다 낙타가 바늘귀로 빠져나가는 것이 더 쉽다.” 라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물론 과장된 표현입니다. 그만큼 어렵다는 뜻입니다. 우리는 재물이 많은 사람을 부자라고 합니다. 그러나 성서에서는 부자와 가난한 자를 재물의 많고 적음으로 구분하지 않습니다.

 

성서에서 말하는 부자와 가난한 자의 구분은 ‘마음을 어디에 두고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다시 말해서 ‘내 마음이 주님을 향해 있느냐?’ 아니면, ‘내 마음이 세상을 향해 있느냐?’의 문제입니다. 그래서 성서에서는 재물에 대한 집착을 경계하고 지혜로운 사람으로 살라고 가르칩니다. 가진 것을 나눌 줄 아는 사람이 지혜로운 사람입니다. 이런 사람이 성서에서 말하는 가난한 자의 모습이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에 모자람이 없는 사람입니다.

바로 우리 같은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지혜로운 사람들입니다. 그래서 세상의 재물을 얻으려고 노력하기 보다는, 하느님을 내 삶의 중심에 놓고, 예수님의 말씀과 삶을 본받으려고 노력하고 있습니다. 그러나 우리의 노력으로 영원한 생명을 얻는다는 것이, 또 하느님 나라를 이 땅에 건설한다는 것이 너무나 힘들게 느껴지기도 합니다. 그러나 우리에게는 희망이 있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사람에게는 불가능하지만 하느님께는 그렇지 않다. 하느님께는 모든 것이 가능하다.” 라고 말씀하셨기 때문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신앙생활이지만 하느님을 믿고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사랑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이것이 영원한 생명을 얻을 수 있는 유일한 길이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하느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면서 하느님의 사랑을 듬뿍 받는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