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26 주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26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과 제자들을 따르지 않으면서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이에 관한 이야기이며, 뒷부분은 죄짓게 하는 것들에 대해 아주 단호하게 대처하라는 예수님의 가르침입니다.

 

오늘 복음의 앞부분에서 요한은 “스승님, 어떤 사람이 스승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저희가 보았습니다. 그런데 그가 저희를 따르는 사람이 아니므로,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라며, 예수님께 당시에 일어난 상황을 설명했습니다. 그런데 요한의 이 말을 풀이해보면, 당시 요한과 제자단이 자신들을 어떻게 생각하고 있었는지 가늠해 볼 수 있습니다.

 

여기에서 요한은 ‘저희’ 라는 단어를 세 번이나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낸 사람이 우리와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임을 강조한 것입니다. 더욱이 요한은 “저희는 그가 그런 일을 못 하게 막아 보려고 하였습니다.” 라는 것은, 그가 올바르지 않게 스승 예수님의 권능을 이용하고 있어서 막으려 했다는 것입니다.

 

제 생각에는 당시 요한과 제자단이 이런 생각을 갖고 있지 않았을까 합니다. 아마 요한은 ‘스승 예수님을 따르지도 않는 사람이 어떻게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낼 수 있다는 말인가? 마귀를 쫓아내는 능력은 자신들에게만 있어야 하는 거 아닌가?’ 하는 부정적인 생각과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권한은 자신들만의 특권이라고 생각했을 것 같습니다. 이런 요한과 제자단의 말과 행동을 보면, 당시 그들은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혀 있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이 듭니다.

 

왜냐하면 12제자들은 예수님의 부르심을 받고 제자단에 들어올 수 있었습니다. 그리고 3년 동안이나 예수님과 함께 생활하며 교육을 받았습니다. 즐거울 때도 있었겠지만 힘든 여정을 보내야 했을 것입니다. 그러니 그들 나름대로 끈끈한 정도 쌓였을 것입니다. 그래서 제자단은 ‘우리는 다른 이들과는 다르다.’ 라는 식의 자신들만의 공동체를 형성했을 것입니다. 그리고 다른 이들은 범접할 수 없는 배타적인 성격도 지녔을 것입니다. 그런데 이러한 공동체성이 하루아침에 무너지게 된 것입니다. 그것은 자신들과는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이 스승 예수님의 이름으로 마귀를 쫓아내는 것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들은 아연실색했을 것입니다. 자신들만이 가질 수 있는 예수님의 권능을 아무런 상관이 없는 사람과 나눠 가질 수는 없다고 생각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요한을 비롯한 제자단은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혔던 것입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막지 마라. 내 이름으로 기적을 일으키고 나서, 바로 나를 나쁘게 말할 수 있는 사람은 없다.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고 말씀하시면서 하느님의 일은 관용과 포용을 통해 보다 큰 하느님의 영광이 드러나면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이와 비슷한 내용이 오늘의 제 1 독서의 말씀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주님께서는 모세에게 있는 영을 조금 덜어내시어 일흔 명의 원로들에게 내려주셨습니다. 그런데 진영에 남아 있던 엘닷과 메닷이라는 두 사람에게도 영이 내려 예언을 했습니다. 이 소식을 전해들은 여호수아가 그들이 예언하는 것을 막아야 한다고 모세에게 전했습니다.

 

여기에서 보면, 민수기 저자는 여호수아에 대해 ‘젊을 때부터 모세의 시종으로 일해 온, 눈의 아들’ 이라고 자세하게 부연 설명을 하고 있습니다. 이것은 여호수아가 이스라엘 최고의 장군이며 개국 공신으로 특별한 인물이었음을 드러낸 것입니다. 이에 반해 엘닷과 메닷은 모든 면에서 여호수아와 비교해서 부족했다는 것을 의미합니다.

 

그런데도 이들이 예언을 하니, 여호수아도 시기와 질투심에 사로잡혀 그것을 막아야 한다고 조언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모세는 질투하는 여호수아에게 “너는 나를 생각하여 시기하는 것이냐? 차라리 주님의 온 백성이 예언자였으면 좋겠다. 주님께서 그들에게 당신의 영을 내려 주셨으면 좋겠다.” 라며, 주님께 대한 소유권을 독점하는 듯한 편협한 태도와 주님 주도권의 자유로움을 부정하는 오만함 등을 버려야 함을 가르쳤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모세의 위대함을 볼 수 있습니다.

 

인간의 시기와 질투심은 평상심과 판단력을 잃게 합니다. 그래서 중요한 것을 간과하게 만듭니다. 오늘 제 1 독서의 여호수아처럼, 또 오늘 복음말씀의 요한과 제자들처럼 하느님의 것을 보지 못하게 하고 인간의 것, 자신의 특권만을 생각하게 만듭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는 “우리를 반대하지 않는 이는 우리를 지지하는 사람이다.” 라고 명쾌하게 정리해 주셨던 것입니다.

 

신앙인은 예수님을 따르는 사람들입니다. 우리는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고 따르는 공동체, 교회입니다. 우리는 높고 낮음의 구분을 하지 않습니다. 많고 적음으로 나누지도 않습니다. 그냥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믿는 이들이면 모두가 교회 구성원이 될 수 있습니다. 아니 입으로 고백을 하지 않은 이들이라도 배척하지 않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배타적이어서는 안 되며 모든 것을 포용하려는 마음을 가져야 합니다. 이것이 하느님께서 원하시는 뜻입니다. 예수님께서는 ‘나’만을 위해서 육화하시고 십자가를 짊어지신 것이 아니라, 모든 사람의 구원을 위해 이 세상에 오셨고 모든 사람을 위하여 돌아가셨기 때문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의 뒷부분에서 예수님께서는 “나를 믿는 이 작은 이들 가운데 하나라도 죄짓게 하는 자는, 연자매를 목에 걸고 바다에 던져지는 편이 오히려 낫다.” 라고 하시며 무관용의 원칙을 제시하고 계십니다. 여기에서 주목해야 할 단어는 ‘죄짓게 하다’입니다. 이것은 영적으로 죄에 물들게 하는 함정, 올가미 등의 의미를 지닌 단어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왜 이렇게 죄에 대해서 강하게 말씀하셨을까요?

이 말씀의 뜻은 ‘믿음이 약한 이들을 죄짓게 하는 것은 그 어떤 범죄보다도 엄중하니 그런 일이 생기지 않도록 조심하라’는 상징적인 의미입니다. 그리고 ‘손과 발과 눈이 너를 죄짓게 하거든 그것을 잘라버려라’는 말씀은 영혼의 가치를 깊이 생각하여 죄를 짓지 않으려는 확고한 마음의 자세가 필요하다는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죄에 대해서 이렇게 강하게 말씀하시는 것은 죄의 근원이 바로 우리의 마음 안에 도사리고 있기 때문입니다. 우리 마음 안에는 ‘잘못된 욕심’이 있습니다. 남들보다 더 높아지고 싶고, 더 갖고 싶은 마음이 잘못된 욕심입니다. 이 잘못된 욕심이 죄를 만들고 믿음이 약한 이들을 죄에 빠지게 합니다. 이 좋은 예가 오늘의 제 2 독서의 말씀입니다.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부자들에게 “그대들에게 닥쳐오는 재난을 생각하며 소리 높여 우십시오. 그대들의 재물은 썩었고 그대들의 옷은 좀먹었습니다. 보십시오, 그대들의 밭에서 곡식을 벤 일꾼들에게 주지 않고 가로챈 품삯이 소리를 지르고 있습니다. 그대들은 이 세상에서 사치와 쾌락을 누렸고, 살육의 날에도 마음을 기름지게 하였습니다.” 라고 경고하며 잘못된 욕심은 멸망의 근원이 된다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너그럽고 자비로운 포용심을 갖고, 사랑의 하느님 나라, 정의로운 하느님 나라를 건설하는 삶을 살기를 원하십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하느님의 것을 배워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하느님의 것이 생명, 정의, 사랑, 평화, 용서, 일치 등 이라고 가르쳐 주셨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하느님의 것을 배워 나와 생각이 다른 이들이라 하더라도 배척하지 않고, 내가 더 많이 배웠다고 해서, 더 많은 재물을 가졌다고 해서 그렇지 못한 이들을 구분해서는 안 됩니다. 우리는 모두 하느님의 자녀들이기 때문입니다. 그러면서도 우리는 죄에 대해서는 단호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자녀답게 죄에 물들지 않고 단호하게 끊어버려야 합니다. 그럴 때 우리는 예수님의 거룩한 마음, 성심을 닮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자비하신 하느님의 마음을 닮아 이웃들에게 사랑을 전하는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