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 대축일입니다. 더욱이 올해는 김대건 신부님의 탄생 200주년을 맞은 희년입니다. 그래서 오늘은 김대건 신부님의 생애와 그분의 사상과 영성에 대해서 알아보도록 하겠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1821년 충남 솔뫼에서 태어났습니다. 그의 아버지는 김제준 이냐시오, 어머니는 고 우르슬라입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어려서부터 뛰어난 신앙심과 총명함으로 주목을 받았습니다. 그래서 파리 외방전교회 소속 모방 신부님은 1836년 부활절에 소년 김대건에게 세례성사를 주고 신학생으로 선발하였으며, 같은 해 12월에 소년 김대건은 동료 최양업 토마, 최방제 방지거와 함께 신학을 배우기 위해 마카오로 유학의 길을 떠났습니다.

 

1837년 6월부터 1842년 3월까지 6년 만에 신학공부를 마친 김대건 부제는 서품 받기 전 잠시 귀국의 길에 올랐습니다. 경비가 삼엄한 국경선을 넘느라 온갖 위험을 극복하고 고국을 떠난 지 8년만인 1845년 1월 15일에 서울에 도착하여 교인들의 환영을 받았습니다. 이미 아버지 김제준 이냐시오는 1839년 기해박해 때 순교하셨고, 어머니는 아들이 돌아오기를 학수고대하며 이집 저집으로 떠돌이 생활을 하고 있었습니다. 그러나 김대건 부제는 본인이 조선에 들어왔다는 소식을 어머니에게 알리지 말라고 부탁하였습니다. 일시 귀국이라 할 일이 너무 많았고 어머니를 만나면 마음이 약해질까 봐 그러했습니다. 귀국 후 3개월 동안 선교사를 모셔 오기 위한 방도를 찾고, 순교자에 대한 자료를 수집하고, 조선 지도를 작성하며 치밀한 준비를 하였습니다.

 

1845년 4월 30일 조선 교구 제3대 교구장인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셔 오기 위해 1백 50냥의 돈으로 한 척의 배를 구입하여 현석문 등 11명의 신자들과 함께 한 개의 작은 나침반만을 가지고 중국 상해를 향하여 떠났습니다. 11명의 신자 중에는 1명의 목수, 4명의 어부, 그리고 배를 타 보지도 못한 6명의 농부만 있었습니다. 배를 띄운 첫째 날에는 순풍에 돛을 달고 잔잔한 파도 위를 달렸으나, 다음날부터 폭풍우를 만나 3일 동안을 시달리게 되었습니다. 김대건 부제도 뱃멀미로 몹시 시달렸으나 신자들에게 성모 마리아의 성화를 보여주면서, “겁내지 마시오. 성모 마리아께서 도와주실 것입니다.” 라고 하며 격려하여 주었습니다. 며칠간의 힘겨운 항해를 한 후, 자비로우신 하느님의 도우심과 성모님의 보호 아래 김대건 부제의 일행은 상해에 도착하였습니다.

 

드디어 1845년 8월 17일에 조국 동포들이 참석한 가운데 페레올 주교님의 주례로 한국인으로는 처음으로 사제 서품을 받았습니다. 서품을 받고 페레올 주교님과 다블뤼 신부님을 모시고 다시 뱃길로 귀국하게 되는데, 이때도 폭풍을 만나 제주도까지 표류하였다가, 마침내 10월 12일 강경 나바위에 상륙하여 무사히 서울로 잠입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귀국 후 11월과 12월 사이에 서울과 경기도 용인의 은이공소의 교인들을 찾아다니며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그 후 1846년 5월 14일 김대건 신부님은 주교님으로부터 서해 해로를 통한 선교사 영입 방도를 개척하라는 지시를 받고, 만주에서 기다리고 있는 메스트르 신부님과 동료인 최양업 토마의 입국을 위해 주교님의 편지와 입국에 사용할 해상지도를 가지고 백령도 해역 순위도 부근에서 고기잡이 나온 중국 어선에게 편지와 지도를 전달하고 돌아오다가, 6월 5일 관헌들에게 체포되어 해주 감옥을 거쳐 6월 21일 서울로 압송되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포청에서 3개월 동안 40차례의 문초를 받는 취조를 받았고 1846년 7월 25일에 최종판결이 내려졌습니다. “사학죄인 김대건을 효수토록 하라.” 그리고 9월 16일 서울 한강 백사장인 새남터에서 집행되었습니다. 부모 슬하에서 15년, 해외생활 10년, 사제생활 1년 1개월 만에 영광의 순교를 하신 김대건 신부님은 1925년 7월 5일 비오 11세 교황에 의하여 시복되었고, 1984년 5월 6일 교황 요한 바오로 2세에 의하여 성인품에 오르셨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25편의 편지를 남겼는데, 한글본 1편, 한문본 1편 나머지는 라틴어로 쓰여 졌습니다. 이 편지들은 자신이 겪고 있던 상황을 보고한 글이어서 사상을 체계적으로 제시해 주지는 못합니다. 그러나 김대건 신부님이 사형장에서 “내가 외국인들과 교섭한 것은 내 종교를 위해서였고 내 하느님을 위해서였다. 나는 천주를 위해서 죽는다.”고 말했듯이, 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과 한국 교회를 죽기까지 사랑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사상과 영성을 잠깐 살펴보겠습니다.

첫째로, 김대건 신부님은 당시 조선의 전통 사상, 즉 중국이 세계의 중심이라는 중화주의적 세계관을 극복하고, 또 하나의 문명 세계인 서양의 학식을 신앙 실천을 통하여 전파하려 하였습니다.

 

둘째로, 김대건 신부님은 선교열에 불타 있었습니다. 그래서 천주교를 박해하고 프랑스 선교사의 입국을 금지하며 처형하는 조선의 쇄국 정책을 야만적 행위라고까지 비난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외부의 지원이 없이는 선교에 성공할 수 없다고 판단하여, 프랑스의 종교 보호 정책이 한국에서도 실현되기를 기대했으며, 선교의 목적을 달성하기 위해 사용되는 수단은 정당한 것으로 여기고, 무력으로 체결한 황포 조약이 한국에서도 적용되기를 희망하였던 것입니다.

 

셋째로, 김대건 신부님이 지녔던 사상의 핵심은 효애였습니다. 한국 천주교회의 출발부터 신자들이 공통적으로 소유해 온 전통적 신심의 바탕은 ‘대군대부’ 사상이었습니다. 그들은 하느님을 인류의 대왕이며 공동의 아버지로 믿었습니다. 이와 같은 신앙의 분위기에서 성장했던 김대건 신부님의 의식 바탕에도 전통적 신심이 잠재되어 있었습니다. 하느님을 아버지로 공경한 신심은 한국인의 최고의 가치 덕목이며 윤리의 근본으로 삼아 왔던 효와 깊이 결합되어 있었습니다. 효의 근본정신은 생명의 근원이며 사랑과 은혜를 베풀어 준 부모에 대한 보은 행위입니다. 따라서 자녀는 아버지에게 최대의 경애를 드리고 절대적으로 순명해야 하며, 아버지의 뜻을 정성으로 받들고 덕행을 실천해야 했습니다. 그리고 효는 공경하고 사랑하는 정으로 결합할 때 참다운 의미가 있습니다. 이처럼 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을 사랑하기 때문에 형벌을 당하고 있다고 했으며, 신자들에게 효애를 가르쳤을 뿐만 아니라, 순교를 통하여 모범을 보임으로써 하느님께 대한 효애심을 철저하게 실천하였습니다.

 

넷째로, 김대건 신부님의 영성은 새로운 것이 아니라 박해 시대 신자들의 영성과 동일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하느님에 대한 인식은 유교적인 효의 개념에다가 그리스도교의 전통적인 신앙이 혼합되어 있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아버지라고 부른 하느님께서는 창조주, 상선벌악을 결정하는 심판관, 모든 권위의 절대자, 온갖 환난에서 보호해 주고 힘을 주는 분, 은총으로 섭리하는 분이었습니다. 또한 김대건 신부님의 의식을 지배한 것은 미래 지향적인 종말론으로 천당과 지옥, 그리고 사후 심판이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말하기를 이 세상은 인간이 항구히 거처할 곳이 아니고 사람은 잠깐 땅 위를 지나가는 나그네에 불과하다고 하면서 현세를 나그네의 여인숙에 지나지 않는 것으로 간주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이 지향하는 세계는 영복을 누릴 천당이고, 현세는 천당을 준비하는 곳이었습니다. 그래서 천국을 얻으려면 마음을 허실하게 먹지 말고 주야로 하느님의 도우심을 받아 악의 세력에 맞서 극복하라고 하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한국 교회의 첫 사제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의 인물됨에 대하여 당시의 조선 교구장이던 페레올 주교님은 “열렬한 신앙심, 솔직하고 신실한 신심, 놀랄 만큼 유창한 말씨는 한 번에 신자들의 존경과 사랑을 받았다.”고 전해주었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서양 학문을 직접 수학하고 체득한 지식인답게 세계 조류에 대해 폭 넓은 지식을 소유하고 있었으며, 세계정세에 비추어 볼 때 한국의 문호를 개방하고 종교의 자유를 허용하는 것이 민족과 국가 발전에 유익한 일임을 역설한 선각자였습니다. 김대건 신부님은 하느님에게 사로잡힌 사람답게 죽음을 목전에 둔 극한 상황에서도 천주교의 진리를 설파했고, 하느님과 교회, 교회의 장상과 동료들, 그리고 신자들을 깊은 애정으로 사랑하였습니다. 그리고 김대건 신부님은 사목자로서의 사명을 충실하게 실천하다가 죽음으로 자신을 완전하게 봉헌하였습니다.

 

이번 한 주간, 김대건 신부님의 굳은 믿음을 본받고 주님의 뜻을 찾고 실천하는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 코로나 19로 인하여 지난 7월 12일부터 65명 이내로만 미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모두 방역수칙 철저히 지켜주시고,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