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24 주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24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은 예수님과 제자들의 대화를 통해 당신이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시는 내용이고, 뒷부분은 당신이 앞으로 겪게 될 수난과 죽음을 예고하시면서, 우리 신앙인들이 걸어가야 할 십자가의 길에 대해 가르치시는 내용입니다. 그러면 오늘의 복음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오늘 복음말씀의 앞부분은 베드로의 신앙고백에 대한 내용입니다. 예수님께서는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12명의 제자들을 부르시어 교육을 시키셨습니다. 교육의 주된 내용은 하느님께서는 어떤 분이신지? 하느님 나라는 어떤 나라인지? 그리고 그 하느님의 나라에 들어가려면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 등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와 함께 여러 번의 기적을 통해 당신 자신이 세상을 구원하시기 위해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드러내셨습니다. 그리고 3년이 지난 후, 이제 제자들이 당신의 가르침을 잘 받아들였는지, 그래서 이제는 당신을 대신해서 이 땅에 하느님 나라를 건설할 수 있는 머릿돌이 될 자격을 갖추었는지를 알고 싶으셨습니다.

 

그래서 카이사리아 필리피 근처 마을에서 제자들에게 물으셨습니다. “사람들이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그러자 제자들이 대답했습니다. “세례자 요한이라고 합니다. 그러나 어떤 이들은 엘리야라 하고, 또 어떤 이들은 예언자 가운데 한 분이라고 합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다시 물으셨습니다. “그러면 너희는 나를 누구라고 하느냐?” 이 질문에 베드로가“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하고 대답했습니다. 다행히 베드로가 예수님의 시험문제에 정답을 얘기했습니다. 이것으로 제자들에 대한 예수님의 교육은 끝마치게 됩니다. 자신을 죽여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 알의 밀알, 베드로를 얻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말씀의 뒷부분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사람의 아들이 반드시 많은 고난을 겪으시고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배척을 받아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흘 만에 다시 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가르치기 시작하셨다.” 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3번에 걸친 수난 예고는 이제 예루살렘에서 당신이 어떻게 죽음을 맞이할 것인지에 대한 예언인 동시에, 이러한 일이 일어나야만 하는 당위성에 대한 설명이었습니다.

 

그리고 이제 당신이 해야 할 일은 제자들을 가르치시는 일이 아니라, 가르친 그 내용을 손수 보여주시겠다는 약속이었습니다. 그 길이 고난의 길임을 뻔히 알지만, 내가 먼저 걸어가니 너희들도 나를 따라 걸어오라는 초대인 것입니다. 이것이 하느님의 뜻을 찾는 길이며,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길이고, 하느님 나라에 들어갈 수 있는 유일한 방법임을 보여주시고자 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르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와 복음 때문에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하시며 마지막 가르침을 행하신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도 사도 베드로처럼 ‘예수님께서 그리스도’이심을 고백하며 영원한 생명을 얻기 위해 자신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그 길을 따라 걷고 있습니다.

 

그러나 신앙인으로 산다는 것은 참으로 어려운 일입니다. 아는 것을 믿어야 하고, 믿는 바를 실천해야 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야고보는 “누가 믿음이 있다고 말하면서 실천이 없으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믿음에 실천이 없으면 그러한 믿음은 죽은 것입니다. 나는 실천으로 나의 믿음을 보여 주겠습니다.” 라고 가르치며 실천이 없는 믿음은 잘못된 믿음임을 강조하고 있습니다. 믿음은 머리로 하는 것이 아닙니다. 믿음은 말로 하는 것도 아닙니다. 믿음은 내 마음과 정성과 힘을 다하여 내 하느님을 사랑하는 것이며, 내 이웃을 내 몸같이 사랑하는 것입니다. 나의 몸으로 드러내야 하기 때문에 어려울 수밖에 없습니다.

 

그러나 우리는 기뻐해야 합니다. 하느님께서 우리와 함께 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이사야 예언자는 고난 받는 주님의 종의 세 번째 노래를 들려주었습니다. “주 하느님께서 내 귀를 열어 주시니, 나는 거역하지도 않고, 뒤로 물러서지도 않았다.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니, 나는 수치를 당하지 않는다. 나를 의롭다 하시는 분께서 가까이 계시는데, 누가 나에게 대적하려는가? 보라, 주 하느님께서 나를 도와주시는데, 나를 단죄하는 자 누구인가?” 우리에게 대적하고 우리를 단죄할 자는 아무도 없습니다. 우리를 단죄할 수 있는 분은 오직 한 분, 하느님뿐이십니다. 그러나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단죄하지 않으실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부족하지만 하느님의 뜻을 찾으려고 노력했고, 그 뜻을 실천하고자 최선을 다했기 때문입니다.

 

이런 얘기가 있습니다. 주님께서 두 제자를 데리고 어떤 길로 들어섰습니다. 거기서 주님께서는 각자에게 무게가 똑같은 십자가 하나씩을 건네주시며, 당신은 이 길이 끝나는 곳에 가 있을 테니 그곳까지 십자가를 지고 오라고 지시하신 다음 자취를 감추셨습니다. 첫 번째 제자는 가볍게 십자가를 매고 가는데 반해, 두 번째 제자는 지독히 힘들어하면서 뒤쳐져 따라갔습니다.

 

십자가를 걸머진 지 하루 만에 첫 번째 제자는 길 끝에 당도하여 십자가를 스승에게 넘겨드렸습니다. 주님께서는 첫 번째 제자의 등을 가볍게 두드려 주시며 “아들아, 아주 잘 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두 번째 제자는 이튿날 저녁이 되어서야 길 끝에 도착했습니다. 도착한 제자는 십자가를 주님의 발밑에 내동댕이치며, “아니, 이런 법이 어디 있습니까! 저한테는 다른 제자보다 훨씬 더 무거운 십자가를 내주시다니요! 제가 이제야 온 것도 그 때문입니다.” 하며 화를 냈습니다.

 

주님께서는 마음이 상한 채 슬픈 얼굴로 두 번째 제자를 바라보며 “십자가는 둘 다 똑같은 무게였느니라.”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그러자 두 번째 제자는 “아니, 그렇다면 앞의 제자는 아주 쉽게 십자가를 옮겼는데, 유독 저만 십자가를 옮기느라 쩔쩔 맸다 이 말씀입니까?” 하고 대답하였습니다.

 

그러자 주님께서는 그에게 “십자가를 탓하지 마라. 그 까닭은 십자가를 지고 오는 동안 줄곧 불평을 늘어놓은 너에게 있느니라. 네가 불평할 때마다 십자가의 무게는 더 무겁게 느껴졌던 것이다. 앞에 온 제자는 십자가를 짊어지고 오는 동안 사랑을 실천했기 때문에 그 사랑이 십자가의 무게를 덜 무겁게 느껴지게 해준 것이다. 그래서 힘들이지 않고 옮길 수 있었던 것이다.” 하고 타이르셨습니다.

 

우리 모두는 누구나 자신만의 십자가를 짊어지고 주님의 길을 따라가고 있습니다. 그러나 누구나 짊어진 십자가이지만 나 자신이 짊어진 십자가가 더 무겁게 느껴지기 마련입니다. 그러나 그렇지 않다는 것입니다. 십자가의 종류는 다를지언정 그 무게는 하나같이 똑같다는 말씀입니다. 내 것과 비교해서 다른 이의 십자가의 무게가 더 가볍지 않다는 것입니다. 여기에서 십자가의 무게를 덜 무겁게 느끼게 해 주는 방법이 있습니다. 그것은 바로 사랑의 실천입니다. 불평과 불만은 십자가의 무게를 더 무겁게 느끼게 해 주는 악영향만을 줄 뿐입니다. 그리고 주님께서는 우리가 짊어질 수 있을 만큼의 십자가를 주신다고 합니다.

 

이왕 짊어지기로 한 십자가입니다. 무겁고 버겁게 느껴지기는 하지만, 가슴으로 받아 안고 묵묵히 예수님께서 먼저 가신 그 길을 따라 걸어가야 합니다. 그리고 먼 훗날 하느님 앞에 서게 되었을 때, 이렇게 고백해야 합니다. ‘주님! 저는 부족하지만 달릴 길을 다 달렸습니다.’ 하고 말입니다. 그러면 분명 하느님께서 말씀하실 것입니다. ‘수고했다. 그리고 고맙다. 내 아들아! 내 딸아!’ 하고 말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도 사도 베드로처럼 ‘스승님은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고백하며, 믿지 않는 이들에게는 어리석어 보이는 십자가의 길이지만 우리가 가야만 하는 길임을 잊지 말고 꿋꿋이 걸어가는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 코로나 19로 인하여 지난 7월 12일부터 65명 이내로만 미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모두 방역수칙 철저히 지켜주시고,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