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21 주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21 주일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은 지난 4주간 봉독되었던 요한복음 6장의 ‘생명의 빵’에 대한 긴 담화 중 마지막 부분입니다. (지난주에는 성모승천대축일이었기 때문에 생명의 빵에 대한 복음말씀을 듣지를 못했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내용은 ‘생명의 빵’에 관한 예수님의 긴 담화를 들은 군중은 부정적인 반응을 보이며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습니다. 이에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도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라는 질문을 하셨습니다. 그러자 시몬 베드로가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라며 신앙고백을 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복음말씀을 자세히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먼저 복음은 예수님께 대한 군중의 부정적인 반응과 많은 사람들이 예수님의 곁을 떠나갔다고 알려주고 있습니다. 지난번에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당시 유다인들은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던 사람들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조금 특별한 능력을 지닌 사람이 나타나면 만사를 제쳐놓고 따라 다니며,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눈으로 확인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 공생활을 시작하시자, 많은 사람들이 구름같이 몰려들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가르침이 율법교사나 바리사이파 사람들과는 달리 권위가 있었으며, 병자들을 고쳐 주시고, 마귀를 쫓아내시며, 빵을 많게 하시는 기적 등을 보았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예수님을 억지로라도 자신들의 왕으로 모시려 했던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과 유다인들의 생각과는 달랐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보이지는 않지만, 영원과 생명, 영적인 것을 추구하셨지만,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힘을 빌려 로마인들과 싸워 승리를 거두어 독립 국가를 건설하기를 원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과 유다인들의 생각이 달랐기 때문에, 유다인들은 예수님의 말씀에 실망을 하여 하나 둘 떠나기 시작했습니다. 평소에 예수님을 적대시하던 사람들뿐만 아니라, 예수님을 적극적으로 따랐던 넓은 의미의 제자들까지도 예수님의 가르침을 못마땅해 하며 떠나갔습니다.

 

이런 배경 속에서 예수님께서는 열두 제자에게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하고 물으셨습니다. 이에 시몬 베드로가 열두 제자를 대표하여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하며 신앙을 고백했습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열두 제자에게 하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라는 질문은, 어떻게 보면 열두 제자를 적극적으로 붙들어서 당신의 곁에 머물게 하려는 의도가 아니었습니다. 너희도 나의 말을 믿지 못하겠거든 갈 테면 가라 하는 식의 질문이었습니다. 왜 그러셨을까요? 예수님의 최우선적인 목표는 당신을 보내신 아버지의 뜻을 이루는 일이었습니다. 그렇다면 아버지의 뜻은 무엇입니까? 하느님께서는 진리이시며, 생명이시고, 사랑 자체이시기에, 인간을 창조하셨고, 또 죄에 물든 인간을 내치지 못하시고, 당신의 외아들 예수 그리스도를 보내주셨으며, 우리는 그리스도를 믿음으로써 영원한 생명을 얻도록 하셨다는 사실입니다.

 

따라서 아무리 당신이 공을 들인 열두 제자라 하더라도 올바른 믿음을 지니지 못했다면 내치시겠다는 의도였습니다. 일시적인 군중심리에 끌려 당신을 따르는 것이라면 모두가 떠나도 하는 수 없다는 것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단 하나만을 필요로 하셨기 때문이었습니다. 그것은 하느님을 위해서, 하느님 나라를 위해서, 썩을 수 있는 한 알의 밀알이었습니다. 다행히도 베드로가 대답했습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베드로의 이 대답은 아주 중요했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 안에 살아계신 하느님의 모습을 보았고, 예수님께서 인류를 구원하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이심을 믿었기에 이러한 대답을 할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은 시간과 공간을 뛰어넘어 우리에게도 요구되는 대답입니다.

 

스탈린 시대 콘펠드라는 젊은 유다인 의사가 있었습니다. 그는 스탈린을 욕했다는 죄로 체포되어 시베리아의 강제 수용소에 수용되었습니다. 마침 감옥에는 그리스도를 믿는 교우가 하나 있었는데, 그는 집요하게 콘펠드에게 개종을 요구하며, 예수 그리스도의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하지만 콘펠드는 정통 유다인이었기에 예수 그리스도에 대한 부정적인 생각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콘펠드의 마음은 좀처럼 움직이지 않았습니다.

 

그러나 그 교우의 집요한 전교 끝에, 젊은 유다인 의사 콘펠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깨닫게 되어 세례성사를 받았습니다. 그 후 콘펠드는 그리스도의 사랑을 실천하며, 일체의 부정과도 타협하지 않으며 살았습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는 수용소의 법을 어기게 되었습니다. 그 이유는 젊은 사람 하나가 암으로 고생을 하고 있었는데, 그 사람은 불손한 사상을 지녔다고 해서 매번 수술 명단에서 제외되어 있었습니다. 콘펠드는 그런 사실을 알고 있었지만, 그는 수용소의 법을 어기면서 몰래 수술을 해주었던 것입니다.

 

수술 명단에 없는 환자를 마음대로 수술하여 병을 고쳐준 것이 괘씸죄가 되어, 콘펠드는 사형선고를 받게 되었습니다. 처형당하기 전날 밤, 콘펠드는 자기가 수술해준 사람에게 가서, 예수 그리스도의 사랑과 구원의 말씀을 열심히 전파하였습니다. 그때 곁에 있던 어떤 사람 하나가 “당신은 이 젊은이의 암 수술을 해주었다는 이유로 죽게 되었습니다. 당신의 선택에 후회는 없습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이때 콘펠드는 유명한 대답을 남겼는데, 그 대답은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후회는 없습니다.”라는 고백이었습니다.

 

그는 예수 그리스도를 선택하였고, 부정과 거짓으로 목숨을 부지하기보다는 예수 그리스도의 진리와 사랑을 선택함으로써, 자신의 목숨을 바쳤던 것입니다. 이 젊은 유다인 의사 콘펠드에게 암 수술을 받아 생명을 다시 얻고, 신앙의 세계에 대하여 새로운 인식을 얻게 된 젊은이는, 훗날 노벨 문학상을 수상하게 된 알렉산더 솔제니친이었습니다. 이 알렉산더 솔제니친에 의해서 시베리아의 젊은 유다인 의사, 콘펠드의 신앙은 다시 살아나게 되었습니다.

 

열두 제자에게 하셨던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은, 시대를 초월하여 지금 우리에게도 결단을 요구하고 있습니다. 우리도 베드로처럼 대답해야 합니다. “주님, 저희가 누구에게 가겠습니까? 주님께는 영원한 생명의 말씀이 있습니다. 스승님께서 하느님의 거룩하신 분이라고 저희는 믿어 왔고 또 그렇게 알고 있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그리고 콘펠드처럼 “그리스도 안에서, 결코 후회는 없습니다.” 라고 고백해야 합니다.

 

이렇게 신앙생활은 늘 선택을 요구합니다. 하느님의 것이냐? 사람의 것이냐? 를 두고 말입니다. 위대한 신앙을 알려주었던 사도 베드로처럼, 시베리아의 젊은 유다인 의사 콘펠드처럼, 이제는 우리가 따라 가야 하는 길입니다.

 

그러기 위해서 우리는 오늘 제 2 독서의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마음에 새겨야 합니다. “그리스도를 경외하는 마음으로 서로 순종하십시오. 교회가 그리스도께 순종하듯이, 그리스도께서 교회를 사랑하시고 교회를 위하여 당신 자신을 바치신 것처럼 사랑하십시오.” 이렇게 순종과 사랑의 덕은 우리를 하느님께 이끌어 주고 있으며 하느님 나라를 만드는 초석이 되고 있습니다.

 

이번 한 주간, 주님께 우리의 신앙을 고백하며 주님께서 알려주신 순종과 사랑의 길을 따라 걷는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 코로나 19로 인하여 지난 7월 12일부터 40명 이내로만 미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모두 방역수칙 철저히 지켜주시고,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