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18 주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18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지난주 복음말씀에 이어서 나오는 ‘생명의 빵’에 대한 긴 담화문 중 앞부분입니다. 먼저 지난주 복음말씀을 상기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우리는 지난주 복음말씀에서 예수님께서 보리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로 오천 명이 넘는 군중의 배를 채워주신 표징 이야기를 들었습니다.

 

그래서 저는 강론을 통해,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은 메시아사상에 젖어 있었기 때문에 특별한 인물이 나타나면,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자신들의 눈으로 확인하기 위해 뒤따라 다녔다는 말씀과, 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의 롤 모델은 위대한 영도자 모세와, 신정정치로 이스라엘을 이끈 다윗 왕이었다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그리고 표징이라는 단어의 뜻은 어떤 사건 안에 숨은 의도, 의미라는 말씀을 드렸습니다.

 

오늘은 여기에 한 가지 덧붙여 드리고 싶은 말씀은,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입니다. 구약시대의 하느님과 이스라엘 백성과의 관계는 ‘주종의 관계’였습니다. 신명기 5장에는 ‘이스라엘아, 내가 오늘 너희에게 똑똑히 일러 주는 규정과 법규들을 들어라! 너희는 그것들을 배우고 명심하여 실천하여라. 나는 너를 이집트 땅, 종살이하던 집에서 이끌어 낸 주 너의 하느님이다. 주 너의 하느님인 나는 질투하는 하느님이다. 나를 미워하는 자들에게는 조상들의 죄악을 삼 대 사 대 자손들에게까지 갚는다. 그러나 나를 사랑하고 내 계명을 지키는 이들에게는 천대에 이르기까지 자애를 베푼다.’ 라고 하시며 십계명을 내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이스라엘 백성은 하느님의 말씀에 따라 십계명을 철저히 지키며 살았습니다. 더욱이 종교 지도자들은 ‘하느님으로부터 부르심을 받은 이스라엘 백성은 더 거룩하게 살아야 한다.’는 미명하에 더 많은 규정과 법규들을 만들어 백성의 어깨를 무겁게 만들었습니다. 그 이유는 이 규정과 법규들을 지키는 것이 복을 받을 수 있는 유일한 방법이라고 생각했기 때문이었습니다. 그러다 보니 규정과 법규 안에 숨어 있는 의도, 의미는 생각하지 못했고, 그저 글자 그대로 규정과 법규만을 지키기에 급급했습니다.

 

이런 선 이해를 가지고 이제 오늘의 복음말씀을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군중은 예수님을 뒤쫓아서 카파르나움으로 왔습니다. 그러나 군중은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의 깊은 의미를 깨닫지 못한 채 자신들의 이기적인 마음을 그대로 드러내고 있습니다. “라삐, 언제 이곳에 오셨습니까?” 제 생각에 ‘군중의 마음은 이렇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봤습니다. ‘선생님, 저희를 떠나지 말아주십시오. 늘 저희에게 빵과 물을 주셔서 배고픔과 목마름을 없게 해 주시고, 저희가 아플 때는 병을 고쳐주셔서 건강을 회복하게 해 주시며, 로마인들이 저희를 억압하고 못살게 굴 때는 저희를 위해서 대신 싸워주세요. 그러면 저희는 선생님을 왕으로 모시고 시키는 대로 뭐든지 하겠습니다.’ 라고 말입니다.

 

군중은 예수님께 주종의 관계라도 불사할 테니 편안하게 살게만 해 달라는, 자신들의 욕심만 챙기면 된다는, 의도가 내포되어 있었습니다. 꼭 오늘 제 1 독서에 나오는 그들의 선조들의 모습과 별로 달라 보이지 않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에 나오는 그들의 선조들도 하느님의 놀라운 능력의 도우심으로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벗어나 ‘해방, 자유, 생명’을 얻었지만, 그 의미를 잊어버린 채 하느님의 뜻을 저버리고 1차적 생리현상인 배고픔과 목마름에 하소연하는 것을 보면 그 후손들도 어쩌면 당연한 결과가 아닐까하는 생각이 듭니다.

 

하여간 빵을 배불리 먹은 군중은 ‘이제 무엇을 더 달라고 해 볼까?’ 하는 호기심으로 예수님을 찾아 나섰던 것입니다. 하지만 예수님의 뜻, 의도는 다른 곳에 있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군중에게 ‘너희가 나를 찾는 것은 표징을 보았기 때문이 아니라 빵을 배불리 먹었기 때문이다. 너희는 썩어 없어질 양식을 얻으려고 힘쓰지 말고, 길이 남아 영원한 생명을 누리게 하는 양식을 얻으려고 힘써라.’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예수님의 이 말씀은, 빵을 배불리 먹었다는 사실에 시선을 빼앗기지 말고, 빵이 상징하는 의미를 생각하라는 의도였습니다. 예수님께서 놀라운 능력으로 군중을 배불리 먹이신 것은 당신 안에 영원한 생명이 있음을 간접적으로 드러낸 사건이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을 믿고 따르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도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사람들의 의식주를 해결해 주시는 분이 아니십니다. 예수님께서 군중에게 알려주고 싶으셨던 것은 하느님의 자녀 되어 사는 길이었습니다. 요한복음 1장의 로고스 찬가에서도 ‘그분을 맞아들이고 믿는 사람들에게는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특권을 주셨다.’ 라고 하였습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주종의 관계를 원하신 것도 아니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자비롭고 정의롭고 사랑이 넘치시는 하느님을 알려주셨고, 그 하느님의 자녀가 되는 방법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리고 이 방법으로 살아갈 때, 우리는 하느님의 자녀가 될 뿐만 아니라, 당신의 벗이 될 수 있음을 알려주셨습니다.

 

그래서 오늘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은 더 이상 헛된 마음을 가지고 살아가는 다른 민족들처럼 살아가지 마십시오. 곧 지난날의 생활 방식에 젖어 사람을 속이는 욕망으로 멸망해 가는 옛 인간을 벗어 버리고, 여러분의 영과 마음이 새로워져, 진리의 의로움과 거룩함 속에서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을 입어야 한다는 것입니다.’ 하고 말씀하셨습니다.

 

사도 바오로의 이 말씀의 의미는, ‘하느님의 모습에 따라 창조된 새 인간’은 하느님을 믿고 사랑하며, 예수님께서 우리를 구원해 주시기 위해 이 땅에 오신 그리스도임을 믿는 사람들이며, 그들은 예수님의 사랑을 배워, 사랑을 받을 줄 알고, 사랑을 할 줄 알며, 사랑을 가르칠 줄 아는 사람들이라는 것입니다. 그리고 이렇게 사랑을 하는 사람들은 예수님 안에 머무는 사람들이며, 이런 사람들이 예수님의 마음을 닮아, ‘이웃을 불쌍히 여기며, 측은하게 여길 줄’ 알게 된다는 것입니다. 즉 예수님 안에, 생명과 자유와 평화가 있음을 믿고 사는 것임을 알려주신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 시대의 군중은 이런 사랑을 이해하지 못했습니다. 군중은 어떻게 하면 하느님으로부터 더 많은 복을 받을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로마의 식민지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어떻게 하면 배고픔과 목마름에서 벗어날 수 있을까? 등의 현실적인 안일함만을 생각하는 태도를 보였습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가르침과 그분의 삶 안에는 이런 현실적인 욕구와 유대교의 율법과 제도를 넘어 사랑이시며, 생명이신 하느님을 보여주셨습니다.

 

‘내가 생명의 빵이다.’ 오늘 복음의 이 말씀은 그 사랑의 생명을 우리 안에 자라게 하라는 말씀입니다. 배불리 먹는 일에 삶의 의미를 두지 말고, 주변의 생명을 자유롭게 섬기고, 그 섬김이 끝나면 물러설 수 있는 당당한 사랑을 실천하라는 말씀입니다. 그것이 하느님을 아버지라 부르는 자녀의 사랑입니다. 넓고 넓으신 하느님의 자비가 우리 생명의 기원입니다. 또한 성체성사는 예수님께서 보여주신 그 사랑을 우리가 배워서 우리 생명의 기원이신 하느님의 자녀로 당당하게 그 사랑을 실천하며 살라는 성사인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에게 생명을 주시고 사랑을 알려주신 주님의 뜻을 받들며 거룩한 나날들로 만들어 가시기 바랍니다.

 

 

 

 

 

 

※ 코로나 19로 인하여 지난 7월 12일부터 8월 8일까지 40명 이내로만 미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모두 방역수칙 철저히 지켜주시고,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