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17 주일 나해 2021년

연중 제 17 주일 나해 2021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17 주일입니다. 오늘의 복음말씀은 요한복음 6장의 ‘빵을 많게 하신 표징’ 이야기입니다. 그리고 다음 주부터 4주에 걸쳐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문을 듣게 됩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과 4주에 걸친 생명의 빵에 대한 담화문을 이해하기 위해서는 우리가 먼저 알아두어야 할 것이 두 가지 있습니다.

 

첫 번째는 예수님 시대 당시 유다인들이 가지고 있던 메시아사상입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바와 같이 예수님 시대에 이스라엘은 로마의 식민지였습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하느님께서 메시아를 보내주시어 자신들을 로마의 식민지에서 해방시켜 독립된 왕국을 건설해 주실 것이다.’ 라는 믿음을 가지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특별한 인물이 나타나면 자신들의 눈으로 그가 메시아인지 아닌지를 확인하기 위해서 열심히 뒤따라 다녔습니다. 오늘 복음말씀에서도, ‘장정만도 그 수가 5천명쯤 되었다.’ 라는 표현만 보더라도 유다인들이 얼마나 간절히 메시아를 기다리고 있었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그리고 그 메시아의 롤 모델은 위대한 영도자 모세와 왕정시대를 이끌었던 다윗 왕이었습니다. 모세는 이스라엘 백성을 이집트의 노예생활에서 구출하여 젖과 꿀이 흐르는 가나안 땅으로 인도했던 영도자였습니다. 그리고 다윗은 신정정치를 통하여 백성을 통치했을 뿐만 아니라, 이스라엘을 중동 지역의 강대국으로 성장시켜 이스라엘 역사상 최고의 전성기를 누렸던 왕이었습니다. 그래서 유다인들은 모세나 다윗 같은 메시아가 오리라고 기대하고 있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는 기적과 표징에 대한 이해가 필요합니다. 복음서에는 기적 이야기가 여러 번에 걸쳐서 나오고 있습니다. 그런데 공관복음에서는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인해 일어난 사건들을 ‘기적’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는데 반해, 요한복음에서는 ‘표징’이라는 단어를 사용하고 있습니다. 이 표징이라는 단어는 ‘어떤 사건 안에 감추어진 의도, 의미’를 뜻합니다. 다시 말해서 예수님께서 초자연적인 능력으로 병자를 고쳐주시거나, 빵을 많게 하시거나, 풍랑을 가라앉히는 사건 등등이, 겉으로 보이는 것이 끝이 아니라, 그 사건 안에 감추어진 의도, 의미가 있으니 그것을 알아차리라는 것입니다.

 

이런 선 이해를 가지고 오늘의 복음말씀을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예수님께서 행하신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은 목격자들에게 대단히 강한 인상을 남겼던 것 같습니다. 4복음서가 모두 전해주고 있을 뿐만 아니라, 마태오복음과 마르코복음에서는 두 번씩 언급되어 있습니다.

 

먼저 요한복음 6장 전체에 관해서 살펴보겠습니다. 다른 복음서와는 달리 요한복음에서는 ‘빵을 많게 하신 표징’에 이어 이 표징의 의미에 대하여 말씀해주는 예수님의 담화문을 함께 전해주고 있습니다. 그런데 요한복음 6장에는 그 첫 단락과 끝 단락에 예수님께서 제자들에게 하시는 질문이 나오는데, 이 두 질문이 요한복음 6장 전체의 메시지를 파악하는데 매우 중요한 역할을 하고 있습니다.

 

그 첫 질문은 5절에 필립보에게 하신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마지막 질문은 67절에 열두 제자에게 하신 “너희도 떠나고 싶으냐?” 라는 말씀입니다. 그리고 이 두 질문 사이에는 35절에 예수님의 말씀이 마치 대답처럼 놓여있습니다. 그것은 “내가 생명의 빵이다. 나에게 오는 사람은 결코 배고프지 않을 것이며, 나를 믿는 사람은 결코 목마르지 않을 것이다.” 라는 말씀입니다. 요한복음의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의 초점은 바로 이 대답에 있습니다.

 

요한 복음사가의 목적은 독자들이 이 글을 읽고, “나는 생명의 빵이다.” 라고 말씀하시는 예수님께 대한 흔들리지 않는 굳은 믿음을 지니게 하는 것이었습니다. 아까도 말씀을 드렸던 것처럼 요한복음에서 ‘기적’은 ‘예수님께서 누구이신지, 어떤 분이신지’를 가르쳐주는 ‘표징’입니다. 오늘 복음말씀의 빵을 많게 하여 군중의 배고픔을 채운 사건도, 예수님의 초자연적인 능력을 드러내려는 것이 아니라, 예수님께서 ‘참 생명’이심을 알려주는 표징인 것입니다.

 

이런 의도는 오늘 복음말씀의 끝에 나오는 ‘군중을 피해가시는’ 예수님의 모습에서 잘 드러나고 있습니다. 빵을 많게 하신 표징을 체험한 군중은 마침내 자신들의 문제를 궁극적으로 해결해 줄 메시아 – 왕이 나타났다고 확신하여 예수님을 강제로라도 왕으로 모시려고 했습니다. 이러한 그들의 행동은, 빵을 많게 하신 놀라운 사건은 체험했지만, 그 기적 안에 담긴 표징, 즉 이 사건의 의도나 의미는 알아차리지 못했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그러한 군중을 피해 혼자서 다시 산으로 물러가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외적인 권세와 영화를 누리기 위해 오신 분이 아니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면, 오늘 복음말씀에 나오는 예수님과 필립보 사이에 오가는 응답을 더 깊이 묵상해 보도록 하겠습니다. “저 사람들이 먹을 빵을 우리가 어디에서 살 수 있겠느냐?” 라는 예수님의 질문에 필립보는 “저마다 조금씩이라도 받아먹게 하자면 이백 데나리온 어치 빵으로도 충분하지 않겠습니다.” 라고 대답했습니다. 필립보의 이 대답은 자신들에게는 군중의 허기를 채우게 해 줄 수 있는 능력이 없다는 의미입니다. 불가능하다는 얘기입니다.

 

이에 안드레아도 “여기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가진 아이가 있습니다만, 저렇게 많은 사람에게 이것이 무슨 소용이 있겠습니까?” 라며 필립보의 말을 거들고 있습니다. 사실, 지금 여기에서 ‘5천명이 먹을 빵을 당장 사와라!’ 라고 한다 해도 불가능한 일일 것입니다. 그러니 2천 년 전에는 엄두도 못 낼 일이었을 것입니다.

 

그런데 오늘 복음말씀에는 작은 믿음을 환히 밝혀주는 아름다운 얘기가 나와 있습니다. 그것은 한 아이가 보리 빵 다섯 개와 물고기 두 마리를 예수님께 봉헌했다는 것입니다. 아마도 그 아이의 부모는 예수님께 도움을 받은 사람이었을 것입니다. 그래서 감사의 마음으로 아이를 시켜 예수님께 ‘허기라도 채우세요.’ 하며 드리지 않았을까 생각됩니다. 참 따뜻한 마음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작고 순수한 봉헌물이 필요하셨습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 봉헌물을 받아들고 감사의 기도를 드리신 다음, 나눔을 통해서 군중이 배불리 먹고도 남을 만큼 많게 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아무 것도 없는 것에서 어떤 일을 시작하신 것이 아니라, 이 아이가 내어놓은 작은 희생과 봉헌물을 통해 ‘놀라운 일’을 이루신 것입니다. 예수님께서 이렇게 하신 것은 당신의 능력이 부족했기 때문이 아니라, 제자들에게 믿음과 사랑을 가르치시려는 깊은 의도가 있었기 때문입니다.

 

예수님께서는 이런 순수한 마음과 작은 봉헌물을 원하십니다. 그리고 이런 마음들이 모여서 하느님 나라가 완성되어 가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도 함께 동참해야 합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작은 봉헌물도 원하고 계시기 때문입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의 작지만 정성스럽게 마련한 봉헌물을 봉헌하면서 하루빨리 하느님 나라가 이 땅에 건설될 수 있도록 노력하는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 코로나 19로 인하여 지난 7월 12일부터 8월 8일까지 20명 이내로만 미사에 참석할 수 있게 되었습니다. 어려운 시기입니다. 모두 방역수칙 철저히 지켜주시고, 건강관리 잘 하시기 바랍니다. 감사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