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말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 2020년

찬미예수님. 오늘은 성 김대건 안드레아 사제와 성 정하상 바오로와 동료 순교자들 대축일입니다.

 

우리나라는 1780년대 이벽을 중심으로 한 실학자들이 학문적 연구를 하면서 천주교 신앙을 받아들였습니다. 이들 가운데 이승훈이 1784년 북경에서 ‘베드로’로 세례를 받고 돌아와 신앙 공동체를 이룸으로써 한국 천주교회가 탄생하였습니다. 선교사의 선교로 시작된 다른 나라들의 교회에 비하면 매우 특이한 일이었습니다.

 

그러나 당시 조선시대는 전통을 중시하던 유교 사상에 뿌리를 두고 있어, 우리 천주교회와 크게 충돌하였습니다. 결국 조상 제사에 대한 교회의 반대 등으로 천주교는 박해를 당하여, 신해박해를 시작으로 병인박해에 이르기까지 1만여 명이 순교하였습니다. 오늘은 초기 한국 천주교회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에 대해서 말씀을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강완숙은 1760년 충청도 내포지방에서 한 양반의 첩의 딸로 태어났습니다. 그녀는 어릴 적부터 지혜가 총명하고 언변도 좋았으며 성격도 활달했습니다. 글도 공부하는 오빠들의 어깨너머로 주워들으며 깨우쳤습니다. 놀라운 것은 그녀가 10여세 때 불교에 심취하여 불경을 공부한 적이 있었는데 책장을 덮으며 하는 말이 ‘허무를 느꼈다.’ 라고 했습니다.

 

강완숙은 이른 나이에 충청도 덕산에 사는 홍지영의 후처로 들어갔습니다. 그녀는 시어머니를 극진히 모시며 전처의 소생 홍필주를 친아들처럼 잘 보듬어 마을에서 칭송이 자자했습니다. 이때에 천주교가 충청도 지방에 전해지자, 강완숙은 “천주란 하늘과 땅의 주인이다. 교의 이름이 바르니, 도리도 틀림없이 참되리라.”하여, 책을 구해 읽고 깊은 감명을 받아 믿음을 갖게 되었을 뿐만 아니라, 집안 식구들과 이웃 여러 마을의 사람들에게도 적극적으로 복음을 전하였습니다. 그러나 아직 세례성사는 받지 못하였습니다.

 

그러던 중 1791년 진산사건이 일어나 윤지충과 권상연 등 여러 교우들이 포졸들에게 잡혀 옥에 투옥되는 사건이 발생하였습니다. 그러자 강완숙은 밥을 지어 몰래 옥에 넣어주며 교우들을 돌보다가 포졸에게 잡혀 며칠간 감금된 적도 있었습니다. 이에 남편 홍지영은 후환이 두려워 헤어져 살기를 원했고, 강완숙은 시어머니와 아들 홍필주에게 이 사실을 말하고 서울로 가겠다고 하자, 시어머니와 아들도 같이 가겠다며 따라나섰습니다. 아들과 아버지를 버리고 강완숙을 따라나선 시어머니와 전처의 소생을 보면, 그녀가 평소에 얼마나 지혜롭게 처신하면서 애덕실천을 잘했는지 짐작할 수 있습니다. 이윽고 서울로 올라온 강완숙은 북촌에 거처를 잡고 여러 교우를 만나 친교를 나누면서 사제영입을 위해 노력하였습니다.

 

1794년 12월 23일 조선입국에 성공한 우리나라 최초의 선교사인 중국인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은 서울에 들어와, 최인길 마티아의 집에 숨어서 6개월 동안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그러나 배교자 한영익의 밀고로 외국인 신부의 입국과 그의 거처가 알려져 체포령이 내리자, 주 신부님은 강완숙의 집으로 피신하게 됩니다.

 

강완숙은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을 모시면서 ‘골롬바’로 세례성사를 받고 여회장으로 임명되었습니다. 골롬바는 시어머니와 전처의 소생이 눈치 채지 못하게 조심스럽게 주 신부님을 모셨습니다. 하루 세끼 음식을 대접하는 것 외에도 신경 쓸 일이 많았습니다. 대문 밖에는 포졸들이 주 신부님을 잡기 위해 혈안이 되어 있었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주 신부님은 골롬바와 자주 상의하여 사목 계획을 세웠습니다.

 

이런 일도 있었습니다. 주 신부님을 광에 숨긴지 어느덧 3개월이 지나 날씨가 추워지면서 더 이상 광에 더 모실 수 없게 되자, 골롬바는 몸져누워 식음을 전폐했습니다. 시어머니가 의원을 부르려 해도 거절하자 마음의 병임을 금방 알아차리고는 이렇게 얘기합니다. “너만 믿고 여기까지 왔는데 무슨 일인지 모르나 굶어 죽으려 하니 나도 살 이유가 없다.”며 따라 죽겠다고 자리를 펴고 누었습니다. 이런 모습을 보면서 골롬바는 이 정도면 믿어도 되겠다 싶어 눈물을 흘리며 사정을 얘기했습니다. “중국에서 우리를 사목하기 위해 신부님이 오셨는데, 조정에서는 신부님을 잡지 못해 난리고, 우리에게 영적 양식을 주는 그 신부님이 잘 숨어 계시는지, 뭘 드시는지 알지 못하는데, 제가 어찌 밥이 넘어 가겠습니까? 어머니, 어찌하면 좋겠습니까?” 이 말을 듣자마자 시어머니가 얘기했습니다. “너를 대단한 여자로 봤더니 이게 뭔 말이냐? 우리가 신부님을 찾아 우리 집에 모시면 될 것 아니냐!” 이에 골롬바는 비로소 화색이 돌았다 합니다. 그리고 시어머니의 손을 굳게 잡으며 광에 모셨던 주 신부님을 사랑방으로 옮기게 되었고, 주문모 신부님은 이곳에서 6년 동안 지내면서 사목활동을 하시게 됩니다.

 

차츰 자리가 잡히면서 주문모 신부님은 명도회를 다시 활성화시켰습니다. 명도회는 북경에 있던 신심단체를 본떠서 만든 회였습니다. 초대회장 정약종 아우구스티노를 중심으로 황사영, 홍필주 등은 명도회 하부조직인 육회의 책임자로 교회의 기틀을 놓는 한편, 북경교회와 조선교회가 쉽게 연락할 수 있는 통로를 모색하고 교회발전을 위해 여러 방면으로 노력하였습니다. 그리고 여회장 골롬바는 대담하게 주 신부님을 모시고 지방을 순회하며 사목활동을 하였습니다. 이처럼 골롬바의 수완과 활약에 힘입어 주 신부님 입국 당시 4,000명이었던 신자 수가 5년 만에 1만여 명이 되었습니다. 그중에는 지체 높은 양반 부녀자들과 머슴, 하녀들도 있었으며 왕실의 친척인 송 마리아와 며느리 신 마리아에게 교리를 가르쳐 세례를 받도록 주선하기도 했습니다.

 

그러다가 1800년 6월 28일 천주교에 대해 비교적 관대했던 정조 대왕이 승하하고, 그의 아들 순조가 어린 나이로 즉위하자, 정순왕후가 수렴섭정을 하면서 한국 천주교회에 박해가 일어났습니다. 이른바 신유대박해입니다. 1801년 정월에 총회장 최창현을 잡아 가두고, 천주교를 금하는 교서를 내리는 동시에 오가작통법을 강화하여 천주교의 전파를 막고 이를 믿는 자를 뿌리째 뽑아내려고 시도하였습니다. 이에 전국 각처에서 수많은 천주교인들이 잡혀 순교하였는데, 그 해 2월 24일에는 여회장 강완숙 골롬바도 그의 일가족과 함께 잡혔습니다. 골롬바는 자기가 체포되는 위기 속에서도 주 신부님만은 안전한 곳으로 피신시켜 체포를 모면할 수 있게 하였습니다.

 

포도청에 잡혀 온 골롬바는 곧바로 문초와 고문을 받았으나 입을 열지 않았습니다. 포졸들은 여섯 차례나 혹독한 형벌을 가했지만 아무 소용이 없었습니다. 그녀의 굳은 신앙심에 기가 꺾인 포졸들은 ‘이 여인은 사람이 아니라 신이다.’ 하였다 합니다.

 

한편 골롬바의 도움으로 피신한 주 신부님은 평안도 의주까지 갈 수 있었습니다. 압록강만 건너면 중국으로 돌아갈 수 있었습니다. 그러나 교우들이 잡혀가 고문을 받고 순교했다는 소식을 들을 때마다 주 신부님은 괴로웠습니다. ‘양들은 하느님의 영광을 위해 죽어 가는데 목자인 내가 목숨을 부지하기 위해 이 강을 건너려 하다니, 지금 제정신인가?’ 하며, 발길을 돌린 주문모 신부님은 3월 12일 의금부를 찾아가 자수하며 “제가 국경을 넘어 조선에 온 것은 오로지 조선 사람을 사랑해서입니다. 예수님의 가르침은 절대 사악한 것이 아닙니다. 남에게, 또 나라에 해를 끼치는 것은 십계명에 금하고 있습니다.” 라고 말했습니다. 이에 의금부에서는 주 신부님에게 5월 31일 군문효수 형을 내리고 새남터 형장으로 끌고 가 처형하였습니다. 이때 주문모 신부님의 나이는 49세였습니다.

 

옥중에서 이 소식을 들은 골롬바는 대단히 애통해 했습니다. 6년 동안 주 신부님을 성심껏 보필해 온 그녀로서는 누구보다 아픔이 컸습니다. 그리고 강완숙 골롬바도 옥중에서 갖은 고난을 겪은 지 3개월만인 1801년 7월 2일에 형장인 서소문밖에서 동료 9명과 순교하였습니다. 그때 골롬바의 나이는 41세였습니다.

 

황사영은 자신이 쓴 백서에 ‘한국교회를 위해 노력한 교우 중에 남녀를 통틀어 강완숙 골롬바를 당할 사람이 없다.’고 기록할 정도였습니다. 2014년 8월 16일 광화문에서 프란치스코 교황님은 주문모 야고보 신부님을 비롯하여 강완숙 골롬바, 전처의 소생 홍필주 필립보 등 124위를 시복하였습니다.

 

오늘 복음에서 예수님께서는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날마다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그 사람은 목숨을 구할 것이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배교를 강요하는 이들의 칼 앞에 당당하게 신앙을 지킬 수 있었던 것은, ‘날마다’ 자신들의 십자가를 짊어지는 고행 속에서도 ‘불사의 희망’, 영원한 생명에 대한 확신을 버리지 않았기 때문에 가능했습니다. 그러니 우리도 이런 신앙의 선조들의 믿음을 본받아야 합니다.

 

이번 한 주간, 우리 신앙의 선조들이 보여주신 하느님께 대한 믿음과 사랑을 본받으며 우리의 신앙도 굳건하게 다지는 나날들이 되시기 바랍니다.

 

주임신부 이용희 사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