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말씀

연중 제 24 주일 가해 2020년 9월 13일 – 강론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강화로 인해 미사에 참석치 못하는 신자분을 위하여 이번주 강론을 올려 드립니다.

미사에 참석치 못하는 신자분은 대송 및 TV평화방송을 통하여 신앙 생활을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중 제 24 주일 가해 2020년 9월 13일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24 주일입니다. 오늘 말씀의 주제는 ‘용서’입니다. 나에게 어떤 이가 아주 사소한 잘못을 했다면, 용서해 주는 것이 어렵지 않을 것입니다. 그러나 자신이 일구어 놓은 모든 것이 허물어질 만큼 엄청난 손해를 입게 되었을 때 용서해 준다는 것은 말처럼 쉽지 않습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베드로가 예수님께 다가와, “주님, 제 형제가 저에게 죄를 지으면 몇 번이나 용서해 주어야 합니까? 일곱 번까지 해야 합니까?” 하고 물었습니다. 그러자 예수님께서는 “내가 너에게 말한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 라고 말씀하셨습니다. 베드로의 생각은 일곱 번이라도 충분하지 않겠습니까? 라는 의도였을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야 한다.”는 것입니다. 예로니모 성인은 이 말씀을 “형제가 다시는 똑같은 죄를 범하지 않게 될 때까지 용서해 주어야 한다.” 라고 해석했습니다.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는 의미입니다. 그런데 이것이 가능한 일인가? 하는 것이 오늘의 복음 말씀을 들은 우리의 숙제입니다.

 

당시 유다인들은 바빌론의 함무라비 법전에 나오는 동태복수법이 있었습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이에는 이, 눈에는 눈’ 이라는 법률입니다. 자신이 손해를 입은 만큼, 상대방에게 손해를 끼쳐도 된다는 법률입니다. 하지만 이런 동태복수법만 있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유대교의 한 랍비는 ‘하느님께서는 우리를 3번까지 용서하신다.’ 라고 가르쳤고, 그래서 유다인들은 3번까지는 용서해야 한다고 알고 있었습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이를 뛰어 넘어 끝없이 용서해야 한다고 가르치신 것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나에게 잘못한 이를 진정으로 용서할 수 있는가? 하는 문제입니다.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에 속한 것입니다. 용서는 우리 인간 본성 안에는 없는 영역입니다. 그나마 우리는 이성을 지니고 있고 하느님의 말씀을 받아들이는 양심이 있기에 용서하려고 합니다. 그렇지만 그것도 한계가 있습니다. 여러분은 어떠실지 모르지만, 저는 아직 덕이 부족하여 하루에도 수도 없이 속에서 미움이 일어나기도 합니다. 저에게 해코지를 한 이들의 얼굴이 하나하나 떠오를 때면 어떻게 할 수 없는 상태가 되어 버리기도 합니다. 이런 제가 할 수 있는 일이란, 부족한 저를 위해 기도하는 것뿐입니다.

 

그렇다면 우리는 어떻게 용서를 해야 하겠습니까? 오늘 제 1 독서에서 집회서의 저자는 “네 이웃의 불의를 용서하여라. 그러면 네가 간청할 때 네 죄도 없어지리라. 종말을 생각하고 적개심을 버려라. 파멸과 죽음을 생각하고 계명에 충실하여라. 계명을 기억하고 이웃에게 분노하지 마라. 지극히 높으신 분의 계약을 기억하고 잘못을 눈감아 주어라.”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하느님과의 관계 안에서 용서하라는 말씀입니다. 어떻게 보면 주님의 기도문처럼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달라는 것입니다. 우리가 용서할 때 하느님께서도 우리의 죄를 용서해 주신다는 것입니다.

 

이렇게 할 수 밖에 없는 이유가 오늘 제 2 독서에 나오고 있습니다. 사도 바오로는 “우리는 살아도 주님을 위하여 살고 죽어도 주님을 위하여 죽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살든지 죽든지 주님의 것입니다. 그리스도께서 돌아가셨다가 살아나신 것은, 바로 죽은 이들과 산 이들의 주님이 되시기 위해서입니다.” 라고 가르치셨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인류의 구원을 위하여 십자가를 지셨고, 그로인해 우리가 구원을 받게 되었으니, 우리는 주님의 것이고, 주님께서 원하시는 삶을 살아야 한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생각해 보면, 우리도 많은 잘못을 하면서 산다는 것입니다. 하지만 나 자신의 잘못은 생각하지 못하고, 나에게 잘못한 이들의 잘못만을 기억한다는 것입니다. 그러니 우리는 내 눈 안에 들어 있는 들보는 보지 못하고, 나에게 잘못한 이들의 눈에 있는 티만 보게 된다는 것입니다. 이것이 바로 우리의 모습입니다. 하지만 우리의 내면을 깊이 들여다보면 우리 안에 자리 잡고 있는 더러움이 보이기 시작합니다. 구역질이 날 것 같은 나 자신의 모습을 보게 됩니다. 그리고 그런 나를 용서해 주셨던 분들의 모습도 보입니다. 어떻게 보면 우리는 이렇게 잘못하고 용서받고, 또 용서하면서 살아야 하는 존재들입니다.

 

그러면 우리와 하느님과의 관계는 어떤가요? 우리는 하느님으로부터 생명을 받고 이 세상에 태어났습니다. 다행히 우리의 자유의지를 통해 하느님의 부르심에 응답하여 신앙인이 되었습니다. 그리고 하느님이 어떠한 분이신지, 하느님 나라는 어떠한 나라인지, 그리고 하느님의 나라에 어떻게 살아야 하는지를 배웠습니다. 그리고 열심히 살겠다고 다짐했습니다. 하지만 늘 잘 살았던 것은 아니었습니다. 돌이켜 보면 아쉬움도 남고, 부족함을 많이 느끼게 됩니다. 우리는 그런 존재들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예수님께서는 일곱 번이 아니라 일흔일곱 번까지라도 용서해 주라는 말씀과 함께 ‘매정한 종의 비유’를 들려주셨습니다. 비유의 말씀을 간략히 요약하면, ‘주인은 자신에게 엄청나게 많은 빚을 진 종의 빚을 탕감해 주었지만, 빚을 탕감 받은 종은 자신에게 아주 적은 빚을 진 친구에게는 매정했다’는 내용입니다. 그리고 결론으로 예수님께서는 “너희가 저마다 자기 형제를 마음으로부터 용서하지 않으면, 하늘의 내 아버지께서도 너희에게 그와 같이 하실 것이다.” 라고 말씀하심으로써 우리의 행동에 따라 하느님의 심판이 달라진다는 점을 알려주셨습니다.

 

우리는 매일 주님의 기도를 봉헌하면서 ‘저희에게 잘못한 이를 저희가 용서하오니 저희 죄를 용서해 주십사’고 기도합니다. 우리는 모두 용서를 해 주어야 하는 존재이기도 하지만, 용서를 청해야 하는 존재라는 것입니다. 특히 하느님 앞에 우리는 무엇 하나 내세울 것 없는 존재입니다. 그런 존재가 하느님의 은총 속에서 한 평생 살게 된 것만 해도 행운이고 행복입니다.

 

아까도 말씀을 들렸던 것처럼 용서는 하느님의 영역입니다. 우리 인간의 영역이 아닙니다. 그래서 우리는 용서하는 것에 많은 부담감을 갖고 있습니다. 하지만 우리는 하느님의 마음을 닮고자 노력하는 신앙인들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달라야 합니다. 그래서 우리에게 필요한 것이 기도입니다. 먼저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하느님의 마음을 닮는 것이 너무나 어려워서 닮지 못하는 나 자신을 위해서 기도해야 합니다. 그리고 용서하는 마음을 주십사 기도해야 합니다. 용서하고자 하는 마음이 생긴다는 것은 하느님의 은총이며 기적이기 때문입니다.

 

끝으로 스페인에 있는 어느 수도원 성당의 고해소 얘기를 해 드리도록 하겠습니다. 그 고해소 위에는 작은 십자가 하나가 걸려 있다고 합니다. 그런데 그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상의 오른팔은 축 처져 있다고 합니다. 오래 전에 그 고해소에서 어느 신자분이 고해 신부님에게 죄 고백을 했는데, 그 죄가 엄청나게 커서 그랬던지 고해 신부님은 그 신자의 죄를 사하는 것을 거절했다고 합니다. 그때 그 위에 있는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의 오른팔이 움직이며, 그 신자분의 죄를 사하라는 뜻으로 십자가 표를 그었다고 합니다. 그 이후부터 십자가에 달린 예수님상의 오른팔이 축 처져 있게 되었다고 합니다.

 

제가 확인을 해 보지 않았기 때문에 이것이 사실인지는 모릅니다. 저도 책에서 읽었을 뿐입니다. 하여간 이 예화가 전하고자 하는 메시지는 하느님의 자비하심입니다. 우리는 그 마음을 배워야 합니다. 그리고 자비로운 마음을 실천해야 합니다. 용서해야 합니다. 그때 우리는 하느님의 은총과 기적을 체험하게 되는 것입니다.

 

이번 한 주간, 하느님과 나 자신과 이웃들과의 관계를 되돌아보며 잘못한 것이 있는지 반성하고, 또 잘못한 것이 있다면 용서를 청하며, 또 나에게 잘못한 이들을 용서하는 자비로운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주임신부 이용희 사도요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