강론 , 신부님말씀

연중 제 22 주일 가해 2020년 8월 30일 – 강론

사회적 거리두기 2.5단계 강화로 인해 미사에 참석치 못하는 신자분을 위하여 이번주 강론을 올려 드립니다.

미사에 참석치 못하는 신자분은 대송 및 TV평화방송을 통하여 신앙 생활을 실천해 주시기 바랍니다

 

연중 제 22 주일 가해 2020년 8월 30일 강론

 

찬미예수님. 오늘은 연중 제 22 주일입니다. 우리는 지난주 복음으로 베드로의 신앙고백과, 예수님께서 베드로라는 반석 위에 교회를 세우시고 수위권을 맡기셨다는 말씀을 들었습니다. 그리고 오늘 복음 말씀은 그 이후의 말씀으로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와, 베드로에 대한 질책, 그리고 예수님을 따르는 길에 대한 내용입니다.

우리는 어떤 큰일을 시작하면서 자신의 포부를 밝힐 때가 있습니다. 이를 ‘출사표’라고 표현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예수님께서는 두 번의 포부를 밝히셨는데, 그 첫 번째가 세례자 요한으로부터 세례를 받으시고 공생활을 시작하시면서 ‘회개하고 복음을 믿어라’ 라는 말씀이었습니다. 그리고 두 번째가 공생활을 마치시고, 예루살렘에서 십자가상의 제사를 드리시기 위해 떠나시면서 말씀하신 오늘의 복음 말씀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입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 말씀은 단호함과 경직된 분위기가 묻어나고 있습니다.

그러면 오늘의 복음 말씀을 자세하게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제가 지난주 강론에서 말씀드렸던 것처럼, 예수님의 삶은 크게 두 부분으로 나뉘어져 있습니다. 앞부분은 갈릴래아 호수를 중심으로 제자들과 함께 생활하시며 가르치셨던 3년간의 공생활입니다. 예수님께서는 3년간의 공생활을 하시면서 베드로라는 백배의 열매를 맺을 수 있는 한 알의 밀알을 만드셨습니다. 그것을 확인한 것이 지난주 복음 말씀인 베드로의 신앙 고백이었습니다.

예수님께서는 이 베드로의 신앙고백으로 이 땅에 오셔서 하시고자 했던 구원사업의 반을 성취하셨습니다. 이제 반을 더 성취하셔야 하는데, 그것은 당신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상의 제사를 드리는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갈릴래아 호수를 떠나 예루살렘으로 길을 떠나시게 됩니다. 그 첫 출발에 당신이 예루살렘에서 어떤 일을 하시게 될 것인지를 밝히신 것이 오늘의 복음 말씀입니다.

오늘 복음 말씀의 서두에서 “예수님께서는 당신이 반드시 예루살렘에 가시어 원로들과 수석 사제들과 율법 학자들에게 많은 고난을 받고 죽임을 당하셨다가 사흗날에 되살아나셔야 한다는 것을 제자들에게 밝히기 시작하셨다.” 라며, 예수님께서 첫 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를 하셨다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이 예수님의 첫 번째 수난과 부활에 대한 예고는 당신이 예루살렘에 올라가시어 행하셔야 하는 십자가상의 제사와 부활 사건을 미리 알려주신 것인 동시에, 당신의 수난과 죽음, 그리고 부활 사건에 동참해 줄 것을 제자들에게 당부한 것입니다.

그러나 예수님의 뜻과 베드로의 생각은 달랐습니다. 베드로는 “스승님은 살아 계신 하느님의 아드님 그리스도이십니다.” 라고 신앙을 고백했음에도 불구하고, 아직 예수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하고 있었습니다. 그래서 베드로는 “맙소사, 주님! 그런 일은 주님께 결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라고 대답을 하자, 예수님께서는 곧 이어 “사탄아, 내게서 물러가라. 너는 나에게 걸림돌이다. 너는 하느님의 일은 생각하지 않고 사람의 일만 생각하는구나!” 라고 꾸짖으셨습니다.

이렇게 하느님의 뜻을 정확히 파악한다는 것은 쉽지 않습니다. 베드로는 예수님의 수난과 부활에 대한 첫 번째 예고를 듣고는 3년간의 공생활이 물거품이 되었다고 생각했을 것입니다. 당연한 일입니다. 하느님의 아드님이시고 그리스도이신 분이 스스로 희생제물이 되시어 십자가에 매달려 죽으신다는 데 어느 누가 말리지 않을 수 있겠습니까? 만약 제가 베드로라도 ‘주님 그러시면 안 됩니다.’ 하고 말렸을 것입니다. 베드로도 그럴 수 밖에 없었습니다. 왜냐하면 예수님의 베드로에 대한 교육의 완성은 십자가상의 제사와 부활 사건을 체험하는 것으로 끝을 맺게 됩니다. 그러니 당연히 베드로는 하느님의 뜻을 온전히 이해하지 못했던 것입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이를 안타까워하시며, 베드로에게 “누구든지 내 뒤를 따라오려면, 자신을 버리고 제 십자가를 지고 나를 따라야 한다. 정녕 자기 목숨을 구하려는 사람은 목숨을 잃을 것이고, 나 때문에 자기 목숨을 잃는 사람은 목숨을 얻을 것이다.” 라고 하시며, 영원한 생명에 이르는 길은 십자가를 통해서만 얻을 수 있는 길이며, 이것이 하느님의 뜻임을 다시 한 번 교육시키셨던 것입니다.

여기에서 예수님께서 말씀하신 의미가 오늘 제 2 독서의 말씀과 일맥상통합니다. 제 2 독서에서 사도 바오로는 “여러분의 몸을 하느님 마음에 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바치십시오. 이것이 바로 여러분이 드려야 하는 합당한 예배입니다. 여러분은 현세에 동화되지 말고 정신을 새롭게 하여 여러분 자신이 변화되게 하십시오. 그리하여 무엇이 하느님의 뜻인지, 무엇이 선하고 무엇이 하느님 마음에 들며 무엇이 완전한 것인지 분별할 수 있게 하십시오.” 라고 가르치고 있습니다.

여기에서 우리는 예수님의 말씀과 사도 바오로의 말씀을 통해 참된 신앙인이 되기 위해서 어떤 자세와 삶이 요구되는지를 알 수 있습니다. 신앙인의 참다운 삶은 순간적이거나 즉흥적인 것이 아니라,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지향하고 있습니다. 그래서 우리는 자기중심적으로, 자기 욕심대로 살지 않습니다. 영원한 생명과 평화는 내 뜻이 아닌 하느님의 뜻 안에서 이루어지기 때문입니다. 그래서 우리의 신앙을 지키는 데에는 용기와 결단이 필요하며, 지혜와 분별력도 요구됩니다. 물론 이 모든 것은 하느님의 은총으로 우리에게 선물로 주어지는 것이기는 합니다.

그런데 문제는 예수님께서 가신 길이 십자가의 길이라는 것입니다. 인간적인 생각으로는 이해하기 힘든 길입니다. 하지만 이 십자가의 길이 우리에게 영원한 생명과 평화를 준다는 것입니다. 그래서 우리는 예수님의 십자가의 길을 따라 걷고 있는 것입니다. 또 이것이 하느님의 뜻입니다. 하느님의 뜻을 따르는 삶은 세상 속에서는 고통과 수난의 길이지만, 하느님의 뜻을 위해 자신을 버리는 행위가 결국 생명에 이르는 길이 될 것이라는 약속인 것입니다.

십자가의 길을 온전히 따르신 분이 계셨습니다. 오늘 제 1 독서에 나오는 예레미야 예언자입니다. 오늘 제 1 독서에서 예레미야 예언자는 하느님께 한탄을 하듯이 기도했습니다. “주님, 당신께서 저를 꾀시어 저는 그 꾐에 넘어갔습니다. ‘그분을 기억하지 않고 더 이상 그분의 이름으로 말하지 않으리라.’ 작정하여도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오르니 제가 그것을 간직하기에 지쳐 더 이상 견뎌 내지 못하겠습니다.”

예레미야 예언자는 자신의 삶이 살면 살수록 힘들고 고되고 손해 보는 것처럼 느껴져서 그렇게 살고 싶지 않은데도 불구하고, 자신의 뼛속에 가두어 둔 주님의 말씀이 심장 속에서 불처럼 타올라서 어쩔 수 없이 주님의 말씀을 선포했다는 것입니다. 힘들고 어려운 예언자의 길이었지만, 이것이 하느님의 뜻이었기 때문에 그렇게 밖에 살 수 없었다는 고백인 것입니다.

신앙생활을 한다는 것은 바로 이런 것입니다. 그래서 신앙인이 가야하는 올바른 길은 각자의 십자가를 지고 예수님을 따르는 것입니다. 예수님을 따르는 것 자체가 이미 십자가를 각오한 것입니다. 왜냐하면 우리는 늘 세상에서 죄와 악의 유혹을 받고 있습니다. 아직 하느님의 구원이 완성된 상태가 아니기 때문입니다. 우리는 구원으로 가는 과정 중에 있습니다. 그러므로 우리는 늘 선택의 삶을 살아야 합니다. 하느님이냐, 세속이냐 하는 선택의 기로에 늘 서있게 됩니다.

그래서 예수님께서는 자신을 버리라고 단호하게 말씀하셨던 것입니다. 따라서 우리의 삶이 진정으로 가치 있고 참다운 행복의 삶이 되려면 예수님께서 가르쳐주신 길을 선택해야만 합니다. 왜냐하면 그 길의 결과를 예수님께서 부활 사건을 통해 이미 우리에게 보여주셨기 때문입니다.

그러니 이번 한 주간, 예수님의 말씀을 믿고 따르며, 예수님께서 걸어가신 십자가의 길을 따르며, 참다운 신앙인의 삶을 사는 나날들 되시기 바랍니다.

 

주임신부 이 용 희 사도요한

 

성화 : 엘 그레코의 성 베드로의 눈물