신부님말씀

부활 제 2 주일 가해 2020년

부활 제 2 주일 가해 2020년

 

찬미예수님. 친애하는 형제자매 여러분 한 주간 동안 안녕하셨습니까?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로 인해서 본당에서 미사가 중단된 지 54일이 되었습니다. 이제 곧 본당에서 미사를 재개하게 될 것 같습니다. 그때까지 건강 잘 챙기시기 바랍니다.

 

오늘은 부활 제 2 주일이며, 하느님의 자비 주일입니다. 우리 가톨릭교회에서 부활 제 2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게 된 이유는 이렇습니다. 요한 바오로 2세 교황께서는 대희년인 2000년 부활 제2주일에 하느님의 자비에 대한 신심이 대단하였던 폴란드 출신의 파우스티나 수녀를 시성하였습니다. 그 자리에서 교황께서는 모든 그리스도인에게 특별히 하느님의 자비를 기릴 것을 당부하였습니다. 이에 따라 교회는 2001년부터 해마다 부활 제 2 주일을 ‘하느님의 자비 주일’로 지내고 있습니다. 외아드님 예수 그리스도의 탄생과 죽음과 부활로 우리를 구원해 주신 하느님의 크나큰 자비에 감사드리고자 하는 것입니다.

 

그래서 오늘 복음 말씀은 부활하신 예수님께서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는 분임을 다시 한 번 보여주고 있습니다. 예전의 공동번역 성서를 보면 오늘 복음 말씀의 소제목을 ‘토마의 불신앙’ 이라고 붙였었습니다. 그래서 오늘의 복음 말씀을 해석할 때나 강론을 하게 될 때, 또는 이 말씀을 들으면 ‘토마스는 자신의 눈으로 모든 것을 확인하려는 믿음이 약한 사람의 표본이다.’ 라고 쉽게 결론을 내렸었습니다. 이것은 토마스를 중심으로 오늘의 복음 말씀을 보았을 때 내리게 되는 결론입니다. 그러나 새로 번역된 성서에서는 오늘 복음 말씀의 소제목을 ‘예수님과 토마스’ 라고 붙이고 있으며, 복음 말씀에 대한 해석도 예수님을 중심으로 보게 하여 토마스의 불신앙이 메시지의 중요 골자가 아니라, 부활하신 예수님의 한없는 자비와 용서에 초점을 맞춰주고 있습니다.

 

네 복음서 모두 토마스가 어떠한 인물인지에 대해서 자세하게 설명해 주지는 않습니다. 다만 요한복음 11장에 보면, 예수님께서 라자로를 소생시키기 위해 죽음의 위협이 도사리는 예루살렘으로 올라가시려 하자, 모든 제자들이 말리고 있을 때,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하면서 제자들을 독려했던 분이라고 전해주고 있습니다. 죽음의 위협이 있는 상황에서 함께 죽으러 가자고 얘기를 했다는 것은, 토마스가 그 누구보다 예수님을 사랑했고, 예수님을 위해서라면 자신의 목숨까지도 온전히 바칠 각오를 했던 제자였다는 것입니다.

 

그런데 놀랍게도 오늘 복음 말씀을 보면 이토록 열정적으로 예수님을 따랐던 토마스가 완고한 냉담자의 모습을 보이고 있습니다. 토마스는 동료 제자들이 부활하신 예수님을 만나 뵈었다는 증언을 들었음에도 불구하고, 그는 “나는 그분의 손에 있는 못 자국을 직접 보고, 그 못 자국에 내 손가락을 넣어 보고, 또 그분 옆구리에 내 손을 넣어 보지 않고는 결코 믿지 못하겠소.” 하고 단언하고 있습니다. 토마스가 왜 이런 얘기를 했는지 그 의도를 정확하게 알 수는 없지만, 저는 두 가지 이유 때문에 예수님의 부활을 믿지 못하게 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첫 번째로 토마스는 예수님께 커다란 희망을 두었던 제자였습니다. 자신의 온 존재를 바칠 수 있다고 생각을 했던 제자였습니다. 그랬기 때문에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처참한 죽음은 토마스에게 엄청나게 커다란 충격을 주었을 것입니다. 예수님의 십자가상의 죽음으로 말미암아 토마스는 모든 것을 잃었던 것입니다. 열정적인 믿음도, 삶에 대한 희망도, 어이없이 무너지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을 해 보았습니다.

 

두 번째는 스승 예수님께 대한 미안한 마음이 들었기 때문이 아닐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실제로 토마스는 “우리도 스승님과 함께 죽으러 갑시다.” 라고 말했을 정도로 예수님을 믿고 따랐던 제자였습니다. 그러나 스승 예수님께서 유다인들의 손에 붙잡히셨을 때, 그는 스승을 위해서 아무 것도 하질 못했습니다. 스승을 구출하지도 못했고, 스승과 함께 고난에 참여하지도 못했고, 스승의 곁에도 머물러 있지를 못했습니다. 또 예수님께서 고통스럽게 십자가 위에서 돌아가셨을 때도, 그는 십자가 밑에서 스승의 죽음을 지키지도 못했습니다. 그는 유다인들의 손에 붙잡혀 고난을 당하시고 십자가의 죽음을 당하신 스승 예수님을 버려둔 채, 유다인들이 무서워 어딘가에 숨어 있었습니다. 이런 자신의 비겁함과 스승을 배신했다는 죄책감이 그의 마음을 닫게 만들었고, 좌절과 불신의 늪에 빠지게 하지 않았을까 하는 생각도 해 보았습니다.

 

토마스는 자신의 힘만으로 이 암흑의 구렁텅이에서 빠져 나올 수가 없는 상황이었습니다. 부활하신 예수님만이 토마스의 마음을 치유하실 수 있었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몸소 토마스를 찾아오시어, 당신의 십자가 상처를 보여주시고 만져보도록 하셨습니다. 못 믿겠다며 마음의 문을 굳게 닫아걸고 있는 토마스에게 ‘평화가 너와 함께 있다’ 하시며 평화를 선사하셨습니다. 이것은 예수님의 특별한 은총이었습니다. 당신을 배신하고 희망을 잃어버린 제자에 대한 특별한 사랑이었습니다. 한없이 자비로우시고 용서하시는 하느님의 모습입니다. 그리고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의심을 버리고 믿어라”, 또 “보지 않고도 믿는 사람은 행복하다“는 말씀을 하셨습니다. 이것은 어떻게 보면 믿지 못하는 토마스를 질책하는 말씀으로 들릴 수도 있지만, 십자가의 충격에서 헤어나지 못하는 토마스를 안타까워하신 격려의 말씀이며 위로의 말씀이었습니다. 이렇게 예수님께서는 토마스에게 특별한 사랑을 보여주셨습니다.

 

그렇다면 토마스는 부활하신 예수님의 손과 발을 보고, 옆구리의 상처에 손을 넣어 보고야 믿었습니까? 그렇지 않았습니다. 토마스는 그 즉시 고백했습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토마스는 그것으로 족했습니다. 스승 예수님의 부활을 눈으로, 손으로 확인할 필요가 없었습니다. 그에게 필요했던 것은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였습니다. 스승 예수님을 배신했다는 죄책감과 자신의 비겁함에 사로잡혀 어쩔 수 없는 상황에 놓이게 된 자신을 예수님께서 다시 찾아와 주신 것만으로 족했습니다. 자신이 제자단에서 버림을 받지 않고, 다시 예수님의 제자로 불림을 받았다는 것만으로 족했습니다. 예수님의 특별한 사랑을 그는 느꼈던 것입니다. 그래서 그는 고백했던 것입니다. “나의 주님, 나의 하느님” 하고 말입니다.

 

이것은 또 다른 부활 이야기이기도 합니다. 왜냐하면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희망이 사라지고 믿음이 죽었던 토마스를 다시 부활시키셨기 때문입니다. 이렇게 부활하신 예수님의 사랑과 용서는, 죽음도, 두려움도, 의심도, 절망도 넘어서서 토마스를 변화시켰습니다. 그래서 부활하신 예수님께서는 우리의 희망이십니다. 예수님께서는 우리가 당신을 배신하고 핍박하고 희망을 잃었다 하더라도, 우리를 버리시는 분이 아닙니다. 예수님께서는 항상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말씀 안에서, 성체성사 안에서, 그리고 가난하고 버림받은 이들의 모습으로 우리를 찾아오십니다. 그때마다 우리는 토마스처럼 고백해야 합니다. ‘당신은 나의 주님이며 나의 하느님이십니다.’ 하고 말입니다. 우리도 토마스처럼 주님께 대한 굳은 신뢰심과 사랑을 갖고 한 주간을 거룩하게 지내도록 합시다.

 

이제 곧 본당에서 미사가 재개될 것 같습니다. 아직 교구에서 결정된 것은 아니지만, 제 생각에는 늦어도 5월 1일 금요일부터 미사가 재개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기대해 봅니다. 그래도 정부에서 신종 코로나 바이러스가 완전히 종식 되었다는 선언이 있을 때까지 미사 외의 모든 모임은 금지하도록 하겠습니다.

 

성화 : 칼 블로흐의 의심하는 토마스